“우린 이제 로봇이란 말 안 써. 인공 인간이라고 하지.”
무대 위 아이들은 로봇을 인공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들에게 로봇을 기계의 집합체로 보는 시대는 과거며, 인간과 로봇은 이미 어떠한 관계를 형성한 존재란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달 7~10일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프랑스 연극 ‘이야기와 전설’은 로봇과 함께하는 인간들의 일상을 청소년 관점에서 관찰하도록 연출됐다.
연출가 조엘 폼므라(61·사진)는 LG아트센터 대극장 중 절반인 500석만 관객이 들도록 했다. 마치 거실의 소파에서 무대를 바라보듯, 몰입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었다. 절제된 무대에서 10명의 배우는 속사포 같은 대사를 치며 110분간 극을 이어갔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 혼란한 성 정체성, 부모와의 아슬아슬한 관계, 죽음, 진실과 거짓을 탐구하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11개 이야기가 촘촘하게 쌓였고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거리의 소년들은 과거 욕정을 느낀 상대가 여성의 모습을 한 로봇이었단 걸 알고 수치심에 젖었다. 그들은 길에서 마주친 다른 여자아이에게 “로봇이냐, 아니냐”를 따져 묻는다. 한편 10대를 지나 어른이 돼야 하는 한 소년은 배려심 많았던 돌봄 로봇을 다른 가정에 팔기로 한다. 불치병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청소년이 평소 동경하던 로봇 아이돌을 만나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아이돌로 활약하던 로봇이 더 이상 상품 가치가 없기에 곧 폐기된다는 로봇 제조사의 결정은 불편한 진실이다. 이는 로봇에 사랑을 고백한 아이가 알지 못하도록 봉쇄됐다. 성장통을 앓는 10대 소년 소녀는 곧 로봇과 인간을 둘러싼 냉엄한 진실에 눈뜨게 될 것이고 고통을 겪게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인간과 인공 인간이 공존하는 생활이 디스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원히 행복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작품에 쓰인 노래도 일품이었다.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가수 달리다의 ‘무대에서 죽고 싶다’를 비롯한 유명 프렌치 팝송의 가사(자막으로 안내된다)는 관객이 작품에 완전히 녹아들게 하는 탁월한 장치였다. 연극의 제목이 ‘이야기와 전설’이기에 아름답고 환상적인 전개를 짐작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러기에 작품이 던지는 ‘있을 법한’ 사실적 묘사가 더욱 따가웠다. 폼므라를 어느 정도 아는 관객이라면 이 작품의 제목이 의도하는 바를 알아차렸을 것 같다. 그는 오래도록 전해 내려온 동화에 기반해 현대 사회를 비춰 보는 3부작 작품(빨간모자, 피노키오, 신데렐라)으로 유럽 연극계에서 유명하다.
폼므라는 현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브룩이 “이 시대 가장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연출가”라고 소개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이기도 하다. 폼므라는 연극에 투신한 이후 33년간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연예술상인 몰리에르상을 아홉 번이나 받았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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