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는 본질적으로 ‘회사의 수임인’이지 ‘주주의 수임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굳이 법률 전문가가 아니어도 상식이다. 이사가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게 곧 총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명약관화하다. 다수결·주주평등 원칙 등 기존 상법 규정만으로도 이사는 전체 주주를 위한 합리적 의사결정의 의무를 부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법원은 불과 20개월 전 ‘상법 개정안이 법체계의 정합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분명한 반대 입장을 낸 바 있다. ‘중장기적으로 회사에 도움 되는 의사결정이 단기 실적을 원하는 소수주주 이익에 반할 수 있다’며 총주주 만족은 불가능한 임무라고 정확히 지적했다. 그랬던 대법원이 느닷없이 “입법 정책적 결정사항”으로 국회가 정하면 따르겠다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대법원은 관련 법안 발의가 많아졌고 학술대회가 열리는 등 세간의 관심이 높아진 점도 찬성 이유로 꼽았지만 ‘사법의 정치화’를 자초하는 격이다. 표 계산이 최우선인 정치와 세미나에서 다른 학자들의 반박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한 줌 학자들 뒤로 숨는 무책임한 행태다.
무엇보다 대법원의 상법 개정 공감 논리가 민망할 정도로 저급하다. “이해상충 관계에 있는 사람이 지배주주와 소수주주일 경우도 있다”고 강조했지만 무익한 정치적 이분법이다. 회사에 이익이 되는 결정은 모든 주주에게 지분에 따른 동일한 이익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회사 이익에 반하는 결정에 형법상 배임죄까지 적용 가능한 상황에서 상법의 이중 족쇄는 이사의 손발을 묶는 악법일 뿐이다.
미국 일본 등 해외 사례 언급도 팩트 왜곡에 가깝다. 판례법 체계의 미국에선 인수합병(M&A) 등 제한적 사안에서 제한적 책임을 물은 소수 판례가 있을 뿐이다. 한국 상법의 모태 격인 일본에서도 이사의 책무 논쟁은 없다. 갑작스러운 대법원의 태세 전환은 사법부 신뢰 추락을 자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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