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당선 직후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에서 한국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콕 찍어 언급한 분야는 조선업이었다. “미국을 치유할 것이다. 미국의 모든 문제를 고치겠다(Trump Will Fix It)”고 승리선언에서 밝힌 트럼프의 눈에 비친 미국 조선업은 고칠 것 투성이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해양방산 경쟁력은 심각한 수준이다. 한때 최고의 경쟁력을 구가했던 미국 조선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한국·일본·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다. 조선업의 몰락은 안보 위기로까지 번졌다.
중국의 해양굴기 속에서 미국은 함정을 유지·보수할 능력이 없어 새로운 군함 건조보다 퇴역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해군력 약화로 대만해협 긴장에서도 미 해군이 중국 해군에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은 중국과의 해양패권 경쟁이 갈수록 격화하는 상황에서 조선업 재건에 시동을 걸고 있다.
미 해군성은 2020년 12월 새로운 미국의 해양전략을 발표했다. 신 해양전략의 명칭은 ‘해양에서의 우세 : 전 영역에서 통합된 해군력을 통한 승리’다. 미국이 주도해온 세계 평화와 번영을 가장 위협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에 집중한 대응 전략이다.
2022년은 미국이 해양에서 중국의 해군력 팽창에 대한 실질적 위협을 체감하고 중국의 해양 확장 견제를 본격화한 해였다. 미 해군은 2022년 8월 미국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항의하며 중국 해군이 대만해협을 봉쇄하는 것을 경험하고 중국의 본격적인 해양패권 도전이 현실화했다는 것을 체감했다.
중국은 ‘중국몽’ 구현을 위해 2035년까지 군 현대화를 마무리하고 2049년까지 미국을 뛰어넘는 세계 일류 강군으로 만들겠다는 ‘강군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랫동안 이어진 미국 중심의 국제 정치·경제 질서를 중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양강국 건설’을 추진하며 해양굴기에 막대한 보조금 지원 등을 쏟아부었다. 중국은 선박 건조량, 신규 선박 수주량, 수주잔량으로 각각 전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해군력 증강에 유리하고 기술 발전 속도도 빠르다.
반면 미국은 세계 최강 군사력을 가졌지만 조선업에선 존재감이 미미하다. 1980년대 보조금 지원 중단 이후 가격 경쟁력을 잃으며 선박 수주 점유율이 0.04%에 그치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53개 조선소에서 연간 1800여 척의 상선을 생산했던 미국이지만 한때 414개였던 미국 내 조선소는 21개로 줄었고 지난해 수주한 신규 선박이 5척에 불과했다.
올해 전 세계에서 1900여 척의 신규 선박이 수주됐으나 이 중 미국은 두 척뿐이다. 그마저도 한국 조선업체들이 수주하는 대형선박이 아닌 연안 지역 해양에서 작업을 보조하는 작은 작업선이다. 최근 10년간 수주점유율이 1%를 넘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해군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군함 숫자를 늘려야 하지만 미국 조선업의 높은 인건비와 낮은 수익성 문제로 자체적으론 당장 불가능하다. 중국 해군이 실제 작전 능력과 성능 면에서는 미 해군 전력에 뒤처져 있지만 양적인 면에서는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 국방부의 ‘2022년 중국군사력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해군은 2020년 340척을 보유해 함정 수에서 미국을 추월했고 조만간 400척까지 늘릴 계획이지만 미 해군 함정은 현재 300척에 못 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중국의 해군력을 억지하려면 함정 500척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선박 건조능력 세계 1위인 중국은 2030년 425척을 보유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 해군정보국(ONI)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조선 능력은 미국의 233배에 달한다. 미국은 또 자체적으로 함정을 유지하고 보수할 능력이 없어 한 번 수리를 맡기면 2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2021년 10월 좌초된 핵추진 공격 잠수함 코네티컷함의 경우 미국 조선소의 낮은 작업 효율 탓에 수리를 받기까지 2년 이상 대기해야 했고 견적서상 수리 기간은 약 2년 6개월(31개월)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내에서는 한국과 협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선업은 미국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인데 자체 역량이 부족하고 협력할 만한 글로벌 플레이어도 많지 않다. 중국과는 패권 경쟁, 일본은 선박 건조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동맹국이자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한국이 사실상 유일한 대안인 셈이다.
헨리 해거드 전 주한미국대사관 정무공사는 최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미국이 한국과 관계 강화를 통해 되살릴 수 있는 산업으로 조선업을 꼽았다. 해거드 전 공사는 미국의 조선업을 구하고 미래에 군사 및 화물용으로 필요한 선박을 공급할 역량을 보존하려면 선박을 미국 밖에서도 만들 수 있도록 존스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스법은 미 항만 사이를 운항하는 모든 상선은 미국인에 의해 건조되고 소유되고 운항되고 미국인을 고용해야 하며 미국에 등록해야 함을 규정한 법이다. 1920년 미국 조선업을 보호 육성하기 위해 제정됐으나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미국 내 해상운송 비용과 선박 건조 비용을 높였고 신기술에 대한 투자와 혁신을 억제해 조선업 쇠락에 일조했다.
2020년에는 미 해군의 차세대 호위함 건조 사업자로 록히드마틴 등 미국 업체를 제치고 이탈리아 핀칸티에리가 선정되기도 했다. 핀칸티에리는 미국 위스콘신에 마리네트 마린 조선소를 소유하고 있어 존스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미 해군이 이탈리아 업체를 선정한 이유는 가격, 품질을 비롯해 건조 기간까지 모든 면에서 자국 조선소보다 우위였기 때문이다. 해거드 전 공사는 미국 내 선박 건조를 장려하기 위해 한국 조선업의 대미 투자를 촉진해야 한다면서 미국에 현대적이며 자동화된 조선소를 새로 지을 경우 공동 소유 구조를 허용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은 지난 2월 HD현대중공업 울산 본사와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을 방문해 한국 조선업체의 함정 건조 역량을 확인했다. 델 토로 장관은 “한국과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이지스 구축함을 포함한 고품질 선박을 건조한다”면서 한국과의 협력이 미 조선업의 위기를 이겨낼 방안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미 해군이 중국 해군력 확장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함정 건조 계획의 일부를 한국, 일본 등에 아웃소싱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미 국방 전문지 리얼클리어 디펜스는 “한국과 일본의 조선업체들은 모듈식 구조, 로봇공학, 인공지능(AI) 및 자동화 공정을 활용해 미국 조선소의 절반 가격으로 군함 건조가 가능하다”며 “미 해군이 낙후된 미국 조선소의 건조 능력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제조 및 생산 프로그램을 배우고 AI, 로봇 기술 등을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유지·보수·정비(MRO) 분야에서는 이미 아웃소싱이 진행 중이다. 미국 정부는 미·중 갈등으로 함정 가동률이 높아진 상황에서 자국 해군 함정에 대한 MRO 물량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일부 물량을 우방국에 위탁하고 있다.
조선 빅2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MRO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키우고 있다. 현재 한국 조선사들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고부가 선박 중심으로 3~4년치 일감을 확보한 상황이지만 업계에선 2027년 이후 수주 물량이 감소하며 호황기 대비 꺾이고 있어 대응책 마련을 위해 부심 중이다.
함정 수명은 보통 30년 정도인데 고장 수리뿐 아니라 성능 유지를 위해 최소 5~10년에 한 번씩 정기점검을 필요로 한다. MRO 사업은 함정 건조 이후 수리, 정비를 지원하며 장기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
글로벌 시장정보 분석 기관 비즈윗에 따르면 전 세계 함정 MRO 시장 규모는 2020년 약 566억 달러(79조2800억원)에서 2030년 705억 달러(98조7500억원)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MRO 시장 규모는 연간 20조원으로 전 세계 시장 규모(98조원)의 5분의 1 수준이다.
지난해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연간 예산 가운데 함정 MRO 예산도 총 139억 달러(20조원)에 달한다. MRO 사업이 K-해양방산의 미래 먹거리로 주목받는 이유다.
트럼프 당선인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된 마이크 왈츠 하원의원 등이 한국 조선업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있는 국내 조선업체들에 기회가 될 전망이다.
왈츠 의원은 지난 10월 28일 싱크탱크인 애틀랜틱카운슬 대담에서 “선박 건조 전문성과 중국 밖에서 대규모로 건조할 능력은 일본과 한국에 있다”며 “그들이 우리와 의미 있는 방식으로 협력하게 하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왈츠 의원은 국무장관으로 지명된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과 함께 지난 4월 ‘국가해양전략을 위한 의회 지침’이라는 초당적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가해양위원회 설립, 해운·조선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 북극과 남극 등 극지에 대한 영향력 강화 등이 담겨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내년 1월 출범하면 왈츠 의원은 이런 구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관측된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미국 함정 MRO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인 함정정비협약(MSRA)을 올해 미국 해군 보급체계사령부와 체결하고 MRO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2022년 국내 최초로 필리핀 해군으로부터 MRO 사업을 수주했고 지난 10월 폴란드 그단스크의 레몬토와 조선소와 공동 MRO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한화오션은 지난 8월 미국 4만 톤급 군수지원함 월리시라호 창정비 사업에 이어 11월 미국 해군 7함대에 속한 유콘함의 정기 수리 사업을 수주했다. 미국 군함 MRO 사업을 수주한 것은 한화오션이 처음이다. 한화오션은 올해 미국 필리조선소를 인수하기도 했다. 한화오션은 필리조선소를 통해 상선·함정·MRO 3개 사업을 모두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 조선업체들은 MRO로 시작해 장기적으로 미 해군 함정을 직접 건조한다는 계획이다.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대만 TSMC처럼 설계 도면을 받아 생산하는 일종의 ‘조선업 TSMC 모델’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회의적인 반응이 나온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양종서 수석연구원은 트럼프 협력 언급 이후 조선업계에 장밋빛 전망이 감돌고 있지만 냉정하게 봐야 할 때라고 진단했다.
양 수석연구원은 “MRO 사업만 하다 끝날 수도 있고 군함 건조까지 제대로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시장을 얼마나 열어줄지가 관건”이라고 했다.
양 수석연구원은 “주력 선종인 상선 발주량이 줄어들고 있어 조선업계가 함정사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데 함정 MRO 사업만으로는 수익을 만회하기 어렵다. 존스법 개정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한국 조선업체들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정도로 아직 확실한 지침이 없기 때문에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끌어내야 한다”고 했다.
실제 미국 정치권에선 대중 견제를 위해 한국 조선업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하지만 한국의 미국 시장 진출을 막아온 존스법 개정 여부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이 많다.
왈츠 의원 등 지역구에 조선소를 둔 정치인들은 존스법 개정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와 세수 손실, 안보 문제 등을 우려해 법개정 자체에는 반대하고 있다. 대신 보조금 지급, 세액공제, 대출 보증 등 인센티브 혜택으로 해외 기업의 미국 내 생산시설 투자를 유인했던 반도체법과 같이 동맹국 조선업체의 현지 투자를 유도하는 방식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왈츠 의원과 마크 켈리 상원의원은 지난 9월 CSIS 대담에서 미국의 조선업을 되살리기 위한 초당적 법안을 준비하고 있으며 대선 이후 의회 회기가 속개되면 발의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당시 대담에서 왈츠 의원은 “우리 동맹들과 제대로 협력해 그 지식재산과 노하우를 다시 미국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닉 차일즈 선임연구원은 “한국과 일본에 건조를 맡기기보다 두 나라로부터 건조 능력을 배우는 것이 해법”이라고 말했다.
존스법 개정은 미국 내 조선업 일자리와 산업 기반을 위협할 우려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사안이다. 법개정이 되더라도 소폭 개정에 그쳐 한국 조선업체들에 실질적인 수혜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처럼 새로운 기회이자 족쇄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양종서 수석연구원은 “미국이 중국에 해군력이 밀리는 절박한 상황인 만큼 우방국인 한국 조선소에서 군함 건조가 가능하도록 전향적으로 규제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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