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는 약간 다른 분위기입니다. 새해를 맞는 흥분은 없습니다. 시대를 꿰뚫는 새로운 단어도 없습니다. 소비와 사회 트렌드 모두 경제 상황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그만큼 쉽지 않은 2025년을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대중들의 동물적 감각은 벌써 이 혼돈의 시간을 대비하고 있는 듯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의 핵심 키워드는 리더십의 동시적 붕괴로 표현해도 될 듯합니다.
미국은 오랜 기간 자유진영의 수호자였고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리더의 자리를 내던질 것 같습니다. ‘America first’를 넘어 ‘America only’가 그의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여파는 간단치 않습니다. 한국 시장은 그의 당선 직후부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환율은 상승하고 주가는 하락 중입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엔솔 등 대표기업의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관세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트럼프의 관세 인상 계획도, 대만에 대한 트럼프의 적대적 감정도 모두 한국에는 악재입니다.
조선업, 방위산업, 원전 정도가 버텨줘도 그 위력이 아직은 미미합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트럼프 리스크 인덱스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나라가 큰 타격을 받을지를 알려주는 지표입니다. 이런 현상은 기존 질서의 파괴자 트럼프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트럼피즘과 함께 한국은 불황이라는 큰 파도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큰 파도가 몰려오면 선원들은 파도가 아니라 선장의 얼굴을 쳐다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를 수습할 수 있는 리더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 리더십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대통령 지지율은 ‘국정 동력 상실’을 우려할 수준으로 추락했고, 정부와 여당에서는 매일 터지는 명태균 녹취록에 내분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야당은 대표의 사법리스크 앞에 서 있습니다. “정치의 문제는 정치가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란 말이 생각납니다.
시장에도 리더십이란 게 있습니다. 한국 시장의 리더는 삼성전자였습니다. 2000년 삼성전자는 국내 시장 시총 1위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후 전체 시장의 주가도, 한국 기업의 이익도 삼성전자가 좌우했습니다. “어려우면 그냥 삼성전자 사둬”라고 주식 초보들에게 말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리더십은 사실상 붕괴됐습니다.
주식시장만 보면 매수의 리더십도 사라졌습니다. 코로나19 때는 동학개미들이 시장을 주도했습니다. 지금 이들은 이미 국장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이 어려울 때면 구세주처럼 등장한 국민연금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국장을 살리는 데 뛰어들었다가는 강력한 반발에 시달릴 게 분명합니다. 시장의 리더도 없습니다.
트럼프라는 파괴자의 등장, 리더십 붕괴에 따른 혼란이 내년을 규정할 키워드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이미 불활실성에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년 사회 소비 트렌드 서적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INWARD) 있다는 점입니다.
골프 대신 달리기를 하고, 오마카세 대신 동네 책방을 찾고, 인스타 대신 일기장을 열기도 합니다. 명품 대신 가족과 조용한 여행을 떠나는 것도 확장된 자기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속도대로 살아가는 정속가능라이프, 정서적 웰니스, 반(反)도파밍, 건강한 고독, 과시가 아닌 안온한 일상을 뜻하는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도 모두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쌓여진 내적인 힘은 위기에 대비할 내성을 길러주고, 고난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갖추게 해줍니다.
한경비즈니스가 내년 키워드로 파괴자의 등장, 그가 가져올 혼돈, 그리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대중들의 대응책인 ‘나를 향한 조용한 투자’를 선택한 이유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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