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 이후 ‘엔화로 미국 국채 투자하기’ 열풍이 뜨거웠다. 일본은행(BOJ) 총재가 구로다 하루히코에서 우에다 가즈오로 바뀌면서 아베노믹스가 종식되고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 인상을 끝낼 것이라는 양대 피벗(통화정책 전환)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엔저가 엔고로, 미국 금리가 인상에서 인하로 바뀐다면 엔화로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것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작년 4월 이후 지난 7월 말까지 엔·달러 환율은 123엔대에서 161엔대로 급등했다. 같은 기간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도 연 3.4%대에서 연 4.2%대로 상승했다. 당초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엔·달러 환율과 미국 국채 금리가 흘러갔다. 증권사 권유에 따라 엔화로 미국 국채를 사들인 투자자의 손실 규모는 홍콩 ELS 손실액만큼 늘어났다. 법정 다툼으로 가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놓일 정도다.
한때 이 손실 규모가 줄어들면서 투자자들이 희망을 품기도 했다. 7월 말 BOJ의 금리 인상 조치 이후다. 때맞춰 일본 재무성의 달러 매도 개입까지 겹쳐 엔·달러 환율은 140엔 내외까지 하락했다. 일부 증권사는 엔·달러 환율이 125엔 선까지 하락해 엔캐리 자금이 본격 청산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또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낮추는 빅컷을 단행함에 따라 미국 국채 투자의 매력이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기 시작했다. Fed 인사의 금리 변경 의향이 담긴 점도표에서는 내년 말까지 기준금리가 연 2.75%로 대폭 인하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오면서 또다시 엔화로 미국 국채를 사라는 증권사의 권유와 함께 실제 투자한 사람이 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증권사의 예상과 권유는 빗나갔다. 9월 FOMC 회의 이후 엔·달러 환율은 140엔에서 155엔 내외로 되돌림 현상이 나타났다. 같은 기간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3.6%대에서 연 4.4%대로, 불과 두 달 남짓 기간에 0.8%포인트 급등했다. 7월 이후 엔화로 미국 국채에 추가 투자했다가 본 손실은 1차 때보다 더 컸다. 이러다간 제2의 ‘키코(KIKO)’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키코 사태는 한국의 환위험 관리 역사상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사태가 불거지기 전에는 금융위기가 미국에서 발생한 만큼 한국은 피해 갈 것이란 분위기가 팽배했다. 미국에서 이탈한 자금이 유입될 것이라는 기대까지 겹쳤다. 은행들은 주가가 오르고 원·달러 환율이 하락할 것이라며 기업에 키코 가입을 권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위기 진원지인 미국의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주가 하락폭이 45%에 그친 반면 한국의 코스피지수는 65%나 급락했다. 금융위기 발생 이후 달러당 850원 밑으로 하락할 것으로 본 원·달러 환율은 거꾸로 1600원까지 올랐고 결국 키코 사태가 터졌다.
당시 국내 기업이 낭패를 본 것은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금융위기로 ‘마진콜’(margin call·증거금 부족)을 당하면 경제 여건이 좋은 곳을 디레버리지(deleverage·기존 투자자산 회수) 대상으로 선택한다는 점, 고수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레버리지 비율(leverage ratio·증거금 대비 총투자 금액)이 높았던 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황은 안 좋다. 트럼프가 다시 집권하게 되면서 고금리·강달러 기조가 세지고 엔화로 미국 국채에 투자한 사람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내년 1월 20일 출범하는 트럼프 정부는 재정 수입 면에서 소득세 폐지, 법인세 감면 등 감세를 추진할 예정이다. 반면 재정 지출 면에서는 뉴딜 정책을 구상하고 있어 재정적자가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재정적자 확대에 따라 국가 부도 위험이 높아지면 미국 국채 금리는 오를 수밖에 없다. 뉴딜 정책 추진에 따라 재정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여건에서는 Fed도 지금 추진하는 금리 인하 기조를 멈출 확률이 높다. 미국의 고금리·강달러 쇼크가 나타나는 여건에서는 BOJ가 금리를 올리더라도 엔화가 강세를 보이는 데 한계가 있다.
엔화로 미국 국채를 투자하다가 손실을 보면 그 어느 투자 실패 건보다 심리적 충격이 크다. 안전자산으로 믿은 엔화와 미국 국채, 두 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종전의 이론이 통하지 않는 뉴노멀 투자 여건에서 안전자산과 위험자산 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특정 자산에 쏠리기보다 투자 대상별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됐다. 증권사와 투자자 모두에게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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