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갈등'이란 단어의 의미 변화

입력 2024-11-18 17:47   수정 2024-11-19 00:06

‘기분상해죄’라는 신조어가 있다. 나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기분을 안 좋게 하는 사람은 죄가 있다는 것이다. 1973년 개봉한 영화 ‘빠삐용’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인생을 낭비한 죄’, 꿈속에 재판받는 장면에서 주인공 빠삐용이 범죄를 계속 부인하다가 끝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죄목이다. ‘인생낭비죄’만큼이나 ‘기분상해죄’도 좀처럼 피해 가기 힘들어 보이는 죄목이다.

최근 4년 동안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2배 증가했지만, 무혐의 비율도 3배 가까이 늘었다.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방증이다. 갑질, 직장 내 괴롭힘도 있지만 반대로 역갑질, 을질 등도 함께 존재한다. 리더십과 팔로어십 사이의 의무와 권리에 대한 행동강령, 조직 내 직무 윤리의 기준이 정립돼 있음에도 여전히 경계가 모호하고, 과도하거나 자기중심적 해석으로 조직문화에 악영향을 끼치는 행동 또한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직장에서의 정상적인 적응과 성장 과정을 괴롭힘으로 오해하는 등 처한 위치와 환경에 따라 비생산적 갈등이 표출되고 결국은 ‘일하지 않는 조직문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제는 과학기술의 획기적 변화와 함께 조직문화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할 시점이다. 올해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은 과거의 전통적 통념을 뛰어넘는 인공지능(AI)으로 풀어가는 ‘AI+물리학’ ‘AI+화학’이 성큼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바깥세상의 ‘생각바뀜’이 예사롭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생활 속의 편리함 등으로 기술 발전은 비교적 쉽게 수용하지만, 인간의 생각바뀜은 쉽지 않다. 사회 구성원의 생각바뀜에는 다양한 갈등과 사회적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많은 위기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힘은 생각바뀜을 위한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등의 주요 원인은 성장 환경, 교육, 경제 등에 따라서 형성된 각자의 정체성이다. 직장 내 괴롭힘, 갑질, 역갑질, 을질 등의 대립 근간에도 성별, 세대별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에 따른 인식 차이가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의 이슈페이퍼 ‘지표와 데이터로 본 세대 갈등’을 보면 세대 간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응답 비율은 2013년 47%에서 2022년 63.2%로 크게 늘었다. 기술 발전 속도만큼 갈등 가능성이 커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사람이 AI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갈등을 인지하고 그 과정에서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소통하고 화해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고 있다. 평균 과잉의 사회 속에서 예외적인 사례를 통해 세상을 보고 타인의 위치에서 나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심리학에 조망수용(眺望受容)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 뒤 타인의 생각, 감정 등을 그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갈등은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갈등 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첫 번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르게 볼 수 있는 마음이다. 조망수용이 필요하다. 또한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만 동시에 위로받으면서 살아간다.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로 부서지기 쉬운 삶에 위로가 있는 작품을 쓴 소설가 한강을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두 번째는 기술 발전에 어울리는 새로운 조직문화의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 사용하는 기술이 바뀌면 우리의 생각도 변화해야 한다. 기술 발전과 동행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문화는 일터공동체를 향한 ‘생각바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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