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지난 5년간 현대차의 해외 시장 점유율과 수익성은 가파르게 올랐다. 4대 그룹에 외국인 CEO는 외계인 같은 존재다. 쿠팡 창업자 김범석마저 한사코 ‘한국 CEO’ 지위를 거부하는 현실이다. 과잉투성이인 한국의 기업 관련 법과 제도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진 것이 많다. 경영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무뇨스로선 부담스러울 수 있다. 내부 소통도 문제다. CEO 주재 회의에 매번 통역을 둘 수도 없을 테니 현대차는 저절로 ‘영어 공용화’가 이뤄질 판이다.
무뇨스 체제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기업 조직과 문화에 적잖은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그에겐 현대차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누구의 측근으로 성장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알아봐 준 정 회장 외엔 마음의 빚이 없다. 내년부터 부회장으로 승진해 완성차 사업 전체를 총괄하게 된 장재훈 현대차 사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뜻밖에도 삼성 공채 출신이다. 삼성물산을 거쳐 닛산, 제너럴일렉트릭(GE), 노무라증권 등 글로벌 기업에서 경험을 쌓은 뒤 2011년부터 현대차그룹에 몸담았다. 상품 기획부터 제조에 이르는 밸류체인 전반을 관장하면서 팬데믹 시절 공급망 위기를 훌륭하게 수습했다. 최근에는 현대차 인도법인의 현지 상장을 성공시키며 국내 기업에선 보기 드문 해외자본 조달의 전범을 보여줬다.
현대차의 인사 혁신은 무사안일과 ‘체리 피커’의 덫에 빠진 기업 관료주의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국적, 지연, 학연, 연줄, 측근 모두 배제했다. 사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제조업 중심 대기업 체제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지배구조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소프트 경쟁력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위기의 근원은 상품시장과 요소시장의 지배력 약화다. 오래전부터 ‘예고된 미래’였음에도 제대로 대응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 무제한 보조금 정책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의 파상공세는 해외를 돌다가 이제 우리 담벼락을 때리기에 이르렀다. 알리, 테무의 발호는 중국 상품의 진격과 동일어다. 중국이 어느 날 저가 수출을 멈춘다고 볼 수도 없다. 지금 파는 가격이 무조건 최고점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더 싸질 게 분명하다. 노동시장에선 젊고 풍부한 노동력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노동조합의 득세와 친노동적 법 규제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그나마 젊은 인력들은 이직이 잦고 평생직장 개념도 갖고 있지 않다. 해외 고급 두뇌 유치는 전 세계 인재를 쓸어 담는 빅테크들이 거대한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기업 관료화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조직 관리와 결속을 위해선 핵심 참모들의 애사심과 충성심도 필요하다. 하지만 전례 답습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이른바 ‘티오’라는 이름의 조직편성표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상대가 달라졌고 시장은 급변했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과의 돈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 투자 규모만 100 대 1 이상 격차가 나는 빅테크와의 첨단경쟁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믿을 것은 핵심 인재를 기반으로 한 혁신이다. 제품과 시스템뿐만 아니라 사람과 생각과 의식 모두를 바꿔야 한다.
미래학자 최윤식 씨는 모든 혁신엔 ‘의심’과 ‘놀라움’이 뒤따른다고 했다. 초기엔 “저게 제대로 되겠어?”라는 반응이 나오지만 의심이 걷히고 나면 비로소 혁신이 조직의 지배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기업 관료주의라는 연못에 큰 돌 하나를 던졌다. 그 파문이 수많은 동심원을 그리며 경제계 전체에 퍼져나가면 의심도 놀라움으로 바뀌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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