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억 달러가 현실적인 수준입니다.”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이 주고받은 기후 재원 협상 내용이다. 개도국에 대한 기후 위기 대응 지원금을 두고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진 끝에 2035년까지 연간 3000억 달러를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시한을 이틀이나 넘긴 격론 끝에 도출된 합의지만, 재원 조달 방안이 구체화되지 않은 데다 최대 공여국인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기후변화 회의론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실행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트럼프는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공언한 만큼 글로벌 기후 재원 조성에 먹구름이 드리워진 상황이다.
주목할 점은 합의문이 기후 재원 조달을 ‘다양한 자금원’으로 명시했다는 것이다. 이는 1992년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 지정된 20여 개 선진국 외에도 중국, 한국 등 신흥국과 중동 산유국의 참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실제로 이들 국가는 이미 자발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중국은 ‘남남협력’ 차원에서 개도국 기후변화 대응을 지원하고 있으며, 한국도 녹색기후기금(GCF)에 3억 달러를 추가 공여하기로 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도 개도국 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를 확대하는 추세다. 특히 UAE는 COP28 의장국으로서 자발적 기여를 선언하며 산유국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재생에너지 투자 시장의 새로운 기회로 이어질 전망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통한 개도국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나 UAE 마스다르와 사우디 PIF(공공 투자펀드)의 글로벌 투자는 이미 시장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RE100 참여 기업이 430개를 넘어서면서 민간 부문의 재생에너지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전력 소비량이 전 세계 전력 수요의 2%를 차지한다는 점은 시장의 성장 잠재력을 보여준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테크 기업은 단순한 재생에너지 구매를 넘어 직접 투자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으며, 이는 재생에너지 시장의 혁신을 가속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안정적 재원 확보를 위한 기후세 도입도 논의 중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14개국이 제안한 국제 금융거래 0.1% 과세안은 연간 4180억 달러의 재원 조달이 가능할 것으로 분석된다. 해운, 항공, 화석연료 채굴 등 특정 산업에 대한 과세나 가상자산,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과세도 검토되고 있다. 비록 주요국 간 합의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기후세가 도입될 경우 개도국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나 기후 기술 개발의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기후세를 통한 안정적 재원 확보는 그린본드나 지속가능연계채권(SLB) 등 기후 금융 상품의 신뢰도를 높이는 효과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COP29 합의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향후 10년간 기후 금융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연간 3000억 달러라는 목표치는 기존 대비 3배 증가한 규모로, 재생에너지와 기후 기술 분야의 대규모 투자를 견인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다양한 자금원의 참여로 ESG 투자 시장이 한층 성숙해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과정에서 자금 지원이 수익성 높은 프로젝트에 편중되지 않도록 하고, 최빈국이나 군소도서국 등 기후변화 취약국에 대한 지원도 균형 있게 이루어지도록 제도적 장치 마련이 과제로 남아 있다.
김준섭 KB증권 ESG리서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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