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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넘치고 예측 불가의 한 남자가 우리 곁을 떠났다.’ 영국 출신의 와인 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이 쓴 추모글 중 한 대목이다. 마지막 문장은 ‘이 남자의 모든 것이 이상했고 그가 너무 일찍 현장을 떠난 것도 특이했다’고 마무리 지었다.
잰시스는 2021년 12월 어느 날 ‘이탈리아 와인의 전설’로 알려진 안드레아 프란게티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고인과는 취재원으로 인연 맺었고 인물평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의 작별 인사 속에는 수많은 퇴고 흔적과 연민이 가득 담겨 있다.
안드레아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대표 와이너리 중 하나인 ‘테누타 디 트리노로’ 설립자다. 산지오베제 등 토착품종에 다소 냉소적이던 그는 외래종인 카베르네 프랑 식재를 주도하는 등 새바람을 일으켰다. 또 시칠리아 활화산 지대의 낡은 농장을 ‘파소피시아로’ 와이너리로 재건했다. 속칭 ‘에트나 와인 혁명’이다.
‘괴짜 천재’가 작고한 이후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와이너리는 건재할까? 희소식이 들린다. 선친의 부재를 극복하고 큰아들 벤자민이 최근 한국을 찾았다. 그는 현재 테누타 디 트리노로의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고 파소피시아로 오너로도 등록돼 있다고 수입사 금양인터내셔날이 전한다.
서울 시내 한 호텔 테이스팅 행사에서 선보인 와인은 모두 3종. 이 중 벤자민이 포도 수확부터 양조 전 과정을 진두지휘한 테누타 디 트리노로(2021)가 돋보였다. 부드러움 속에 스며든 강렬함과 복합적인 분위기가 단박에 잡혔다. 카베르네 프랑 위주의 기존 블렌딩 비율이 메를로 베이스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테이스팅 진행을 맡은 벤자민은 “선친의 카베르네 프랑 사랑은 유별났다. 블렌딩 비율을 바꿔 걱정이 많았는데 첫 번째 시음에서 우리 와인 특유의 향과 맛은 물론 아버지 흔적도 함께 만날 수 있었다”며 우는 듯 웃는 표정을 지었다. 성인 남자의 ‘처절한 그리움’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는 이어 “정해진 레시피는 없다. 다양한 요소가 양조방식을 결정하고 빈티지마다 차이가 많다”고 밝히고 “지루하지 않고 먹고 싶은 와인을 느낌 그대로 만드는 것이 우리 와이너리의 신념”이라고 말했다.
실제 안드레아의 블렌딩 비율은 작황이나 품질, 테루아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매년 다르게 적용됐다. 메인 품종인 카베르네 프랑의 경우 1998년 80%, 2013년 50%, 2020년 92%를 유지했다.
그러나 벤자민이 만든 2021년 빈티지는 메를로 60%를 사용했다. “와인이 좀 더 빠르게 열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카베르네 프랑은 40%만 섞어 보조 역할을 맡겼다.
다음은 샤르도네 100%의 화이트 와인 콘트라다 파소키아네치(2019)로 넘어갔다. 강하고 독특한 향이 첫 느낌으로 다가왔다. 해발 950m의 서늘한 기후와 에트나 화산의 테루아 덕분이다.
초반에는 강한 산도와 거친 질감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부드러워졌다. 신선한 과일 풍미와 산미의 균형감이 고급스럽게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마신 콘트라다 람판테(2020)의 특징은 한마디로 풀보디와 산뜻한 산도의 조합. 붉은 과일 향과 함께 복합적이면서도 균형 잡힌 와인이다. 높은 고도에서 재배된 포도 덕분이다.
‘새로운 발견’은 와인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다. 안드레아의 예술적, 직관적인 성향은 도전과 극복으로 이어졌다. 그에 비해 농업공학 전공인 아들 벤자민의 체계적, 과학적 관리가 또 다른 성장으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김동식 와인칼럼니스트
juju433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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