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거실로 나왔는데, 웬일인지 창밖이 대낮처럼 환하다. 거실에서 밀랍인형처럼 서서 창밖을 바라보니,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다. 첫눈이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첫눈치고는 믿기 힘들 만큼 눈송이는 굵고 양도 풍성하다. 이미 전나무 가지며 이웃집의 지붕에 폭설이 소복하게 쌓이고 있다. 나는 탐스럽게 내리는 눈발을 바라본다. 원추형의 가로등 불빛 아래로 쏟아지는 함박눈은 하얀 새떼 같다. 새떼는 하염없이 지상으로 투신한다. 아, 저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천지간이 고요에 들었음을 깨닫는 찰나 몸에 전율이 일었다. 저 큰 눈송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세상은 이토록 고요하구나!
고요는 관조의 불꽃을 빚는 질료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고요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고요, 분주한 움직임들이 일으킨 소란이 잦아진 뒤 찾아온 정적, 소음의 부재, 무, 그 자체. 고요는 관조의 불꽃을 빚는 질료이다. 고요는 생각의 묘판(苗板)이 아닐까? 우리는 고요라는 묘판에 생각의 씨앗들을 파종한다. 그 묘판에서 생각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밀어 올린다. 새벽 눈 뜨기 직전의 꿈이 뇌리에 떠올랐다. 나는 활자로 가득 찬 신문지 위에 글을 썼다. 신문지 양면을 펼쳤으니, 전지(全紙) 한 장이다.
그 위에 삐뚤빼뚤 무언가를 적는데, 자음과 모음의 크기가 다르고, 글자 간격도 제멋대로였다. 나는 꿈속에서 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고 혼잣말을 했다. 전지 한 장을 가득 채울 만큼 무언가를 쓰고, 쓰고, 또 썼다. 나는 문자를 적는 일에 몰입해 있었다. 신문의 활자 위에 겹쳐 검정 매직펜으로 쓴 문자들이 보여준 건 볼만한 조형 예술이라고 생각을 했다.
돌아보니, 항상 고요 속에서 글쓰기를 해왔다. 고요하지 않은 데서 몰입은 방해를 받는다. 몰입이란 내 안의 고요와 나를 둘러싼 세계의 고요가 상호 조응하는 상태이다. 고요는 몰입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관조하는 생활의 바탕이고, 사유를 고양하는 촉매제라고 할 것이다. 고요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유의 능동을 품은 활동이다. 글쓰기는 고요 속에서 자아가 파열하고 분열하며 이루어진다. 그 사유의 파편들이 세상으로 날아간다. 나 스스로도 내가 쓰는 것들의 의미를 다 알지는 못한다. 어둠 속에서 더듬어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 듯이 겨우 무지에 기대어 무지 너머로 나아갈 뿐이다.
내면의 고요로 충만한 빛을 찾아
내가 무지하다는 관념은 오래전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바다의 미풍’에서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라고 했다. 그 인상적인 시구에 크게 공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육체는 슬프다는 구절은 불현듯 육체를 채운 무지에 대한 자각을 드러낸다. 세상의 책을 그토록 읽었건만 육체(대뇌변연계)는 여전히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책이란 앎의 매개체이자 무지의 덩어리이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우리가 무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오히려 책을 많이 읽을수록 무지를 키울 가능성이 커질 수는 있다.
무지란 앎의 없음이다. 일체의 모름과 무구함, 빈곤 상태가 무지이다. 내 경우 모든 글쓰기는 무지 너머로 씩씩하게 나아감이다. 그것은 무지의 초월이나 극복과는 다른 무엇이다. 순수한 무지는 우리 의지를 자극한다. 무지를 무지 자체로 견디는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앎이란 무지를 견딘 힘에 의해 확장된다. 깊은 강이 흘러가듯 무지는 우리 안에서 고요하게 흘러간다. 그 흘러감은 의식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고요를 품고 흘러간다. 무지는 차라리 우리 안에 머무는 고요로 충만한 큰 빛이다.
나는 태고의 무지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고 생각한다. 무지와 앎은 대립하지 않는다. 무지는 상식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앎. 그것은 온갖 사유를 머금고 우리 안에 머문다. 생득적 무지는 수행자의 화두이며 수행의 한 방편이다. 선불교의 스승들은 무지를 깨우는 데 집중한다. 선사(禪師)들은 우리 안의 본성을 꿰뚫고 나오는 무지를 적발하고 만천하에 드러내며 마구 두드려 팬다. 고상한 물음에 엉뚱한 답하기, 애써 묻는 행위에 다짜고짜 몽둥이 후려치기로 답하기. 이를테면 “달마 조사가 동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대답하기이다. 선사들은 그런 방식으로 무지가 무지인 줄도 모른 채 잠든 자아를 벼락같이 깨운다.
무지여, 나를 이끈 스승이여
지금 날이 밝아오는데, 여전히 눈이 쏟아지는 중이다. 눈은 좀체 그칠 기미가 없다. 이 폭설에 갇힌 야생 짐승들은 굶기도 하겠구나. 눈을 뭉쳐 쥐면 손은 차가울 것이다. 갑자기 시장기가 돈다. 뜨거운 북엇국 한 그릇 생각이 간절하다. 돌이켜보니, 평생 걸은 배움의 길은 지식을 푯대 삼은 것이었으나 나는 무지의 겉을 훑었을 뿐, 무지 안의 무지에는 가 닿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간다. 나는 무지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세상에 나와 만난 지혜로운 스승들은 다 무지의 즐거움을 아는 듯했다. 무지는 모름이다. 아니, 무지는 모름의 앎이다. 모름은 앎과 대척되는 게 아니다. 무지 속에서는 방향을 결정할 근거가 없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으로 내 자아는 자주 머뭇거림, 망설임 속에 유폐되기 일쑤이다.
다른 한편으로 무지는 생각의 도약대이기도 할 것이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무지가 가진 인력이다. 무지여, 나를 이끈 스승이여. 세상의 앎을 다 품는다는 점에서 무지는 거대한 앎이다. 우주 자체가 모름의 큰 덩어리인 것을! 무지를 회피하지 말라. 무지와 마주하고 품어라. 무지에 기대어 무지의 심연으로 나아가라. 그 도중에 무지에 부딪쳐서 머리가 깨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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