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생 염지혜 작가(42)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태를 걱정하며 말한다.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린 그다. 남은 건 상처투성이의 '예민한 내장'뿐.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선배 작가 홍이현숙(66)이 본인의 지난날을 회고하며 답한다. "나에게 닥쳐온 질병은 새로운 작업을 촉발하는 계기였다. 이제는 몸이 아픈 사람들과 또 다른 연대를 이뤄내려고 한다."
염지혜·홍이현숙 두 작가의 목소리로 녹음한 사운드 작업 '돌과 밤'(2024)의 일부다. 동시대 퍼포먼스 예술의 최전선을 달리는 이들이 20여년 세대를 뛰어넘어 만난 것.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2인전 '돌과 밤'은 자갈처럼 발에 채고, 밤처럼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는 존재한테 위로를 건네는 전시다.
신작 프로젝트 4점 등 30여점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북서울미술관의 연례 기획전인 '타이틀 매치'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작가 두 명을 선별해 비교해 보이는 전시다. 여성 작가 둘이 참여한 것은 지난 2014년 제1회 타이틀 매치 '강은엽 vs. 김지은' 이후 10년 만이다.
두 작가는 각각 '돌'과 '밤'이라는 소재로 사회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홍이현숙 작가의 신작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인수봉'은 북한산 인수봉의 암벽을 탁본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작업이다. 바위 표면에 크레용을 비벼 본을 뜬 11.25m 높이의 천 작업이 함께 걸렸다.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물든 천은 기후 위기를 암시하는 장치다.
부산 아미동에서 촬영한 '아미동 비석마을'도 돌을 다룬다. 일제강점기 당시 공동묘지가 들어섰던 곳으로, 6·25 전쟁 피란민들이 원래 있던 비석을 빨래판이나 계단으로 활용했다. 죽은 이와 새롭게 살아가는 이들 모두한테 아픈 역사가 서린 공간이다. 영상에서 작가는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피란민을 직접 연기했다.
주목할 점은 꽃무늬 패턴이 새겨진 파란 원피스다. '물주기'(2005) '몽골에서 사라지기'(2011) 등 작가의 전작부터 반복해서 등장하는 의상이다. 2000년대 중반 몽골을 여행하던 작가가 시장 좌판에서 저렴하게 구입했다고 한다. 작가는 "어려운 시절을 살아간 중·하류층 여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염지혜 작가의 '밤'이다. 2010년대부터 바이러스와 플라스틱, 인공지능(AI) 등으로 문명의 위기를 지적해온 그가 '마지막 밤'을 경고하며 나섰다. 작가는 "코로나19 전후로 모든 것이 가속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지구가 금방 소진될 것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작가의 답은 '주름'이다. 뻥 뚫린 고속도로가 아니라, 주름처럼 울퉁불퉁한 길을 걸으며 속도를 늦춰보자는 의미다. 칠흑처럼 어두운 전시장 2층에는 작가의 신작 영상작업 두 점이 상영된다. '마지막 밤'의 주인공인 노인과 '한낮의 징후'의 중심 소재인 바닷가재는 주름진 피부를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상을 끝까지 보고 나면 작가들이 초반에 언급한 '예민한 내장'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한테 고통을 주는 뒤틀린 내장은 오히려 소화를 지연시키는 것을 돕는 '주름'이기도 하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주변의 돌과 밤을 돌아봐야 할 시간"이라는 두 작가의 말에 힘을 싣는다. 마지막 밤처럼 어두운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이들한테 필요한 말이다.
전시는 내년 3월 30일까지.
안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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