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2월 09일 09:40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한국이 망해도 롯데는 안 망한다고 본 거죠."
미쓰비시UFJ, 미쓰이스미토모(SMBC), 미즈호는 일본의 3대 '메가뱅크'로 꼽힌다. 이들 세 곳은 자체적으로 국가·기업별로 신용등급을 책정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이들 은행은 롯데그룹 계열사의 신용등급을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보다 높게 평가한 것을 전해진다. 롯데가 일본에서 폭넓게 사업을 전개하는 것 등을 반영한 조치다.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도 서울 롯데호텔과 롯데월드타워 건설 자금을 일본계 은행에서 조달했다. 롯데는 초저금리 자금을 제공하는 일본계 은행을 등에 업고 차입금을 대폭 늘렸다. 인수합병(M&A) 폭넓게 진행했다. 시장에서 '무차입 기업', '짠돌이'로 통했던 롯데그룹은 어느새 30조원으로 불어났다. 불어난 차입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곳곳에 허점이 드러났다. 자금순환이 막히거나 조기상환 계약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는 치명적 실수를 이어갔다. 유동성 위기설이 불거진 계기를 스스로 제공했다는 비판도 불거졌다.
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은 이달 19일 회사채 2조450억원어치의 조기 상환을 막기 위한 사채권자 집회를 연다. 롯데케미칼이 회사채의 사채관리계약 조항에 담긴 재무조건을 위반하면서 조기상환 사유가 발생한 탓이다. 롯데케미칼이 위반한 조항은 '최근 3년 평균 상각전영업이익(EBITDA)이 이자비용보다 5배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롯데케미칼이 눈덩이 손실에 직면하면서 이 같은 조항을 위반했다.
IB 업계 관계자들은 롯데케미칼의 재무약정을 보고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통상 이 같은 재무약정은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들이 기관 투자가를 안심시키기 위해 투자자와 맺는다. 과거 재무구조가 나빴던 대한항공과 두산중공업이 이 같은 재무약정을 맺은 바 있다. 하지만 조기상환 우려가 있는 데다 재무구조가 나쁘다는 낙인이 찍힐 수 있어서 반기는 기업은 없다.
부채비율이 70%대에 불과한 롯데케미칼이 이 같은 재무약정을 맺자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이 재무약정은 2012년 일본 미즈호가 롯데케미칼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케미칼은 2012년 석유화학제품의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012년 영업이익이 3717억원으로 2011년(1조4682억원)에 비해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실적이 나빠지자 미즈호는 롯데케미칼 회사채 인수조건으로 이 같은 재무약정을 요구한 것이다. 미즈호는 그동안 롯데그룹의 우군이었다. 롯데호텔은 물론 롯데월드타워 건설도 미즈호의 대출금을 활용했다. 한때 미즈호 서울지점은 국내에 투자하는 유가증권의 절반을 롯데그룹 계열사 상품으로 채우기도 했다. 롯데그룹은 이들 은행과 수십 년 동안 관계를 이어가면서 상대적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했다.
2010년 중반까지 롯데그룹 발행하는 회사채마다 미즈호 등 일본계 은행이 참여했다. 초저금리를 등에 업은 일본계 은행 덕분에 롯데그룹은 회사채 금리를 대폭 낮췄다. 2012년 롯데그룹의 차입금 조달금리는 연 1%대 중후반 수준이다. 당시 비슷한 신용등급의 기업들이 연 2~3%대였다. 일본계 은행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수십 년 우군으로 지냈던 미즈호도 돈 앞에서는 철저했다. 롯데케미칼 실적이 휘청이는 만큼 재무약정을 요구한 것이다. 이 같은 약정은 회사채 증권신고서에 기재되지 않는다. 한국예탁결제원이 관리하는 사채계약서에 기재돼 있다. 롯데케미칼 재무팀은 이 같은 재무약정을 어느 순간 잊고 지냈다. 2012년 이후 실적이 좋아진 데다 요구하는 투자자도 없는 만큼 삭제해도 되는 조항이었다. 하지만 이후 발행하는 회사채의 사채계약서에도 이 같은 재무약정이 삽입됐다.
하지만 롯데케미칼이 상당한 적자를 내면서 이 재무약정이 '인계철선'으로 작용했다. 조기상환 우려가 불거지면서 롯데그룹의 유동성 위기설이 촉발된 것이다. 일본계 자금이 그룹의 부메랑이 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롯데는 일본계 자금을 바탕으로 M&A 시장에서도 광폭 행보를 보였다. 호텔롯데는 2015년 미국 호텔인 '더 뉴욕 팰시스 호텔' 인수대금을 대기 위해 미즈호와 SMBC를 통해 8000만달러를 조달하기도 했다. 같은 해 롯데렌탈(옛 KT렌탈)을 인수할 때도 300억엔 규모의 사무라이 본드(일본에서 엔화로 발행하는 채권)를 찍어서 대금을 마련했다. 이 채권도 일본계 은행이 적잖게 사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무차입 회사'로 통했던 롯데그룹은 일본계 자금을 등에 업고 M&A 시장에 자주 나섰다. 롯데그룹은 2021년부터 최근까지도 일진머티리얼즈(2조7000억원), 한국미니스톱(3134억원), 한샘(2995억원), 중고나라(300억원) 등 크고 작은 기업 7곳을 인수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성과는 크지 않았다. 덩달아 그룹의 차입금은 30조원으로 불어났다. 이 같은 상황에서 2005년 신격호 창업주가 한 일본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도 재차 회자되고 있다. 그는 당시 "이해할 수 없는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금을 차입한다는 경영원칙이 있다"고 밝혔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