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23일, 메릴랜드주 내셔널 하버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서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단상에 올라 이같이 말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배넌은 이날 트럼프 정부가 할 일을 세 갈래로 소개했다. “첫째는 국가안보와 주권을 되찾는 일, 두 번째는 경제민족주의에 관한 일, 세 번째는 행정국가를 해체하는 일”이다.
그의 거침없는 언변 속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형님’을 자처하며 세계화를 주도해 온 기간 동안, 국가 개념은 희미해졌다. 세계가 잘 되도록 하는 것이 미국이 잘 되는 길이라고 믿어 왔고 한동안 그런 듯이 보였지만, 사실은 아닌 부분이 있었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전 세계 GDP 대비 비중은 1960년대 40%에서 최근 25%로 쪼그라들었다. 세계화의 과실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따먹고 있다. 미국이 따온 과실도 주로 부자들의 몫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 점을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7년여가 지난 지금, 미국은 다시 트럼프 대통령을 맞이할 예정이다. 지난 1기 트럼프 정부에서 온건하게 시행하려던 정책, 탕평을 추구했던 인사는 거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트럼프 당선인의 마음은 확고하다. 그는 충성파만을 데리고 초반 1~2년 동안 모든 정책을 속전속결로 집행할 생각이다. 배넌이 말한 세 가지 정책의 축은 그대로이고, 강도는 한층 강해졌다.
트럼프 당선인은 흠결이 많은 사람이다. 송사에 휘말린 것도 많고 폭로된 추문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국경이 필요하다"는 트럼프의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에게는 그까짓 개인사가 별 문제거리가 아니다. 트럼프 당선인은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인 자유나 민주주의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시장을 지지하지만, 시장경제를 상징한다기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그가 상징하는 것은 반(反) 세계화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강도에 차이가 있었을 뿐 이런 흐름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사람들도 자유무역과 아웃소싱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지지(제임스 토머스 칼라일 리서치 및 투자전략 대표)”하고 있어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도 트럼프 1기의 대중 관세정책 등을 그대로 이어갔던 점은 인상적이다.
이번 트럼프 2기 정부에서도 ‘국경 있는 세계’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이미 대 멕시코·캐나다 관세 도입과 대중 관세 추가 부과 등을 밝혔다. 한국을 벼르고 있는 피터 나바로 전 무역위원회 위원장도 무역고문 자리에 돌아왔다. 높은 관세, 낮은 에너지 비용과 물가, 낮은 달러가치, 강한 기축통화 지위 등 그가 주장하는 목표는 서로 모순된다. 그래도 상관 없다. 미국 국경 안에 있는 자들(중에서 합법적 지위를 획득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한다는 인상만 남으면 된다.
며칠 전 만난 한 산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이런 정책을 추구하다 보면 누가 미국 옆에 남겠느냐”고 했지만 미국 내에서 그런 질문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다. 파이가 좀 줄어도, 비용을 좀 치러도 국경 있는 세계에 살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은 중국과 더불어 세계화의 총아였다. 최근 20여년 동안엔 특히 중국 경제의 성장에 힘입어 경제 덩치를 키웠다. 반 세계화의 흐름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기업과 경제에 긍정적이기 어렵다. 전과 달리 이제는 기업의 국적, 자금의 국적도 시시콜콜 따지게 되었다. 한국 기업의 기를 북돋울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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