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의 IT인사이드] 미국 테크 우파의 부상

입력 2024-12-10 17:22   수정 2024-12-11 00:13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정부 시스템이다. 정부는 스타트업처럼 운영되는 군주제로 대체해야 한다.”

미국의 유명 블로거이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커티스 야빈의 주장이다. 그는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Movement)’를 주창한 인물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국가 운영을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기업형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고 믿는다.

야빈의 급진적 발상이 미국 정계에 스며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다. 트럼프의 러닝메이트인 J D 밴스 부통령 당선인이 공무원을 대규모로 해고하고 정부 관료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한 배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정부효율부(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라는 부서를 구성하려고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부효율부의 공동 수장에 지명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각종 연방정부 보조금과 공무원 인력을 대폭 축소해 정부 효율성을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야빈의 후원자 피터 틸
야빈의 사상이 급격히 부상한 배경에는 피터 틸 팰런티어 회장이 있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성공한 테크기업 창업자이자 투자자 중 한 명이다. 페이팔을 공동 창업했고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딥마인드 등에 투자해 100억달러 이상의 자산을 일궜다. 그의 저서 <제로 투 원>은 글로벌 스타트업 업계의 필독서로 꼽힌다.

틸 회장은 야빈이 창업한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야빈의 생각이 미국 정계로 확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왔다. 야빈을 밴스 부통령 당선인에게 처음 소개한 이도 틸 회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틸 회장은 2022년 밴스의 상원의원 선거 캠페인에 1500만달러를 기부했고, 트럼프 당선인에게 밴스를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머스크 CEO와 틸 회장은 페이팔을 함께 창업했다.

야빈의 ‘국가 CEO’ 모델은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국가와 기업은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가 단순히 시장 원리에 집중하면 공공복지와 다양한 이해관계 조정 등은 비효율적이라며 외면할 위험이 있다.
한국에서도 통할까
‘테크 우파’가 신반동주의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반기업적 성향이 강한 조 바이든 정부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인공지능(AI) 모델 위험성 정보 등을 정부에 보고하는 내용의 AI 규제 행정명령을 내놨다. 연방거래위원회(FTC)는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등에 반독점 행위 혐의로 날을 세우기도 했다. 여기에 자국 산업 보호에 적극적인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신반동주의가 꽃을 피우는 모양새다.

한국에서도 규제는 논란거리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역대 대통령 모두 규제 개혁을 국정 과제로 내세웠다. 대부분 규제가 줄었다고 선전했지만 산업 현장에서 체감은 덜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사) 중 17곳은 국내에서 각종 규제로 사업을 아예 할 수 없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바꿔야 한다. 미국에선 신반동주의의 영향력이 커질 정도로 규제가 심해졌다고 하지만 스타트업은 여전히 맘 놓고 회사를 키울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야빈의 사상이 통할까. 차별, 혐오, 억압 등을 조장할 수 있어 주류가 되긴 어려울 것이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간 균형을 찾으면서 성장한 국가다. 야빈식 국가 모델은 과거 권위주의 정부를 떠올리게 할 가능성도 크다. 다만 정부효율부의 아이디어는 참고해도 되지 않을까. 규제를 더 완화하고 정부 운영의 투명성과 속도는 높이는 방향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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