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에도 얼지 않는 나무처럼… [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2024-12-10 17:24   수정 2024-12-11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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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좋아한 헤르만 헤세는 ‘정원의 구도자’ ‘치유의 정원사’로 불렸다. ‘가지 잘린 떡갈나무’라는 시에서 그는 ‘나무여, 얼마나 가지를 잘라댔는지/ 너무나 낯설고 이상한 모습이구나./ 어떻게 수백 번의 고통을 견뎠을까./ 너에게는 이제 반항과 의지만 남았구나./ 나도 너와 같다./ 가지는 잘려나가고 고통스런 삶을/ 차마 끝내지 못하고 야만을 견디며/ 매일 이마를 다시 햇빛 속으로 들이민다’라고 썼다.

이어서 ‘내 안의 여리고 부드러운 것을/ 이 세상은 몹시도 경멸했지./ 그러나 누구도 내 존재는 파괴할 수 없다./ 나는 자족하고 타협하며/ 수백 번 가지가 잘려나가더라도/ 참을성 있게 새로운 잎을 낸다./ 그 모든 아픔에도 이 미친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기에’라고 노래했다. 무참히 잘린 가지의 상처에서 희망의 잎을 피워올리는 나무, ‘미친 세상’의 야만과 치욕 속에서도 생명과 사랑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주는 시다.

영하 80도에도 견디는 자작나무

나무는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혼자 견뎌야 한다. 한 자리에 선 채 ‘잔인한 계절’을 이겨내야 새봄에 잎을 피울 수 있다. 나무는 어떻게 추위를 이기며 빙점(氷點) 이하에서도 얼지 않는 걸까. 첫 번째 비결은 자신의 세포에서 물을 빼버리고 탈수 상태로 겨울을 나는 것이다. 세포와 세포 사이로 수분을 옮겨 얼음 결정이 세포 밖에 생기도록 한다. 침엽수와 자작나무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영하 80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비결은 체내 화학 성분을 조절해 빙점을 낮추는 것이다. 차량 부동액처럼 나무도 당분과 수용성 단백질, 지질 등의 함량을 높여서 세포 내 수분이 어는 온도를 낮춘다. 고로쇠와 단풍나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침엽수는 몸속에 물을 공급하는 헛물관의 지름이 활엽수보다 작아 혹한에도 기포가 잘 생기지 않는다. 이 덕분에 내부 조직이 얼거나 상하지 않는다.

겨울에도 푸른 잎을 유지하는 상록수의 생존 전략 또한 흥미롭다. 상록수 잎 표면에는 두꺼운 보호막이 형성돼 있어 수분 증발을 막아준다. 잎 내부에는 빽빽한 잎맥이 퍼져 있어 영양분을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잎 가장자리의 부드러운 털이나 비늘 같은 구조는 찬바람과 추위를 막아준다. 잎의 구조를 조절하거나 색깔을 어둡게 해서 햇빛을 최대한 흡수하는 등 광합성도 적극적으로 한다.

또 하나의 생존 비결은 ‘겨울눈’(winter bud, 越冬芽)이다. 앙상한 가지 끝의 잎 진 자리에 볼록하게 생긴 부분이 겨울눈이다. 이는 방한 기능을 갖춘 털이나 촘촘한 비늘잎, 단단한 껍질, 송진 등에 둘러싸여 있다. 그 속에 꽃을 피울 꽃눈(花芽)과 잎을 돋울 잎눈(葉芽), 가지를 만들 가지눈이 들어 있다. 꽃과 잎을 같이 피우는 섞임눈도 있다. 이렇게 추위를 이긴 겨울눈만이 봄꽃과 싹을 틔울 수 있다.

나무가 견뎌야 하는 것은 날씨만이 아니다. 생장 환경과 병원균, 곤충, 동물, 인간 등 주변의 모든 것과 싸우면서 살아야 한다. 숲속에서는 나뭇가지와 잎들이 서로 햇빛을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인다. 아래쪽 잎은 햇빛을 받지 못해 떨어지고 윗부분 잎만 살아남는다. 그런 모습이 갓을 닮았다고 해서 수관(樹冠) 또는 초관(草冠)이라고 부른다. 그 사이에 땅속에서는 뿌리들이 영양분과 물을 서로 빨아들이려고 아우성을 치며 다툰다.

이런 나무들의 생존 전략에도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다. 일본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싸우는 식물>이란 책에서 “식물이 사실 치열한 싸움 속에서 살아가지만 기나긴 투쟁 끝에 선택한 것은 다른 생물과 공존 관계를 구축하고 상호 이익을 얻는 공생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식물이 균류와의 싸움 끝에 균류와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고, 꽃가루를 노리는 곤충을 수분 도구로 쓰며, 씨방을 비대하게 키우고 열매를 만들어 동물과 새에게 먹이로 주면서 번식에 이용하는 게 그런 사례다.

나무와 풀이 지닌 독성분도 쓰임이 크다. 인간은 식물의 미세한 독성분을 활용한 녹차와 홍차, 커피, 코코아, 허브티 등을 즐기며 각성의 매개로 삼는다. 식물이 숲에서 해충 및 병원균의 접근을 막기 위해 독성분을 내뿜는 동안 삼림욕을 즐기기도 한다. 약한 독의 자극은 생명의 방어 체제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이른바 유해한 물질이라도 소량이면 인체에 좋은 효과를 줄 수 있다는 ‘호르메시스 효과’다. ‘독초와 약초가 한 뿌리에서 나온다’는 말도 이와 같다.

씨앗의 신비와 '살아 있는 스승'

나무가 이렇게 극적인 일생을 통해 이루려는 최종 목표는 자손의 번성, 즉 생명의 재탄생이다. 이는 씨앗을 매개로 이어진다. 식물학자 캐럴 배스킨이 “씨앗은 어린 식물체가 도시락과 함께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처럼 씨앗은 싹이 날 때까지 필요한 영양분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 이 씨앗은 봄이 오기 전에 겨울 추위를 반드시 겪고, 날씨가 풀리는 과정까지 거쳐야 봄에 싹을 틔울 수 있다.

씨앗은 ‘휴면기’라는 걸 거치는데, 씨앗마다 휴면의 깊이가 다르다. 외부 환경을 둘러싼 시련과 내면의 성장통을 극복하는 힘도 다르다. 이를 통해 날씨, 햇빛, 토양, 그 밖의 많은 요소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생존법을 정교하게 배운다. 그래서 헤세는 자연을 ‘가장 위대한 도서관’이라 하고, 나무를 ‘살아 있는 스승’이라고 했다. 요즘같이 엄혹한 시기에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나무의 지혜를 되새기며 헤세가 말한 ‘살아 있는 스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본다.

“나무는 우리가 어린 생각으로 불안해하는 저녁이면 그렇게 속삭인다. 나무는 우리보다 오래 사는 만큼 생각이 깊고 여유 있으며 차분하다.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나무는 우리보다 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나무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나면, 짧고 조급한 생각에 익숙해 있던 우리는 비길 데 없는 기쁨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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