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이런 얘기들을 하는 미국인 중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K드라마 마니아도 있다. 우리를 늘 ‘국뽕’ 차오르게 하던 접두어 ‘K’. 한국 브랜드의 전방위적 활약을 뜻하는 ‘K-Everything’이란 말도 있다. 그랬던 K의 위세가 비상계엄 쇼크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K에브리싱의 딱 하나 예외, 정치가 만악의 근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처럼 극심한 정치적 대립을 겪는 나라가 또 있을까. 정당은 증오와 혐오를 교리 삼은 종교집단이요, 그들 간의 충돌은 진리의 배타적 승리를 위한 종교 전쟁 양상이다. 한국 정치에도 K를 붙인다면 KFC쯤 될 게다. 격돌(fight)과 갈등(conflict)으로 점철된 UFC 같은 혈투 말이다.
이런 절망적 정치 상황에서 유아적 반응으로 핵폭탄을 터뜨린 사람이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불러온 혼란과 국가적 손실에 응분의 책임과 대가를 져야 한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이 제기한 한국 정치 모순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 핵심은 권력 구조에 있다.
한국 권력 구조의 정점은 5년 단임형 대통령제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산물이다. 장기 집권과 독재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이 5년 단임제를 낳았다. 개헌 정국을 주도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의 ‘순번제’ 이해관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차례대로 대통령을 했다. 승자 독식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다. 그러나 87체제 권력 구조의 더 큰 문제는 이른바 ‘이중적 정통성’,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국회의 권력 분점이다.
대통령과 대등한, 아니 더 비대해진 입법부의 폭주는 노무현 정권 이후 지속해서 노골화했다.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할 정도’로 사람을 털어버리는 인사청문회, 주어진 예산 속에서도 일체 건드릴 수 없는 정부 조직, 국회 상임위가 연중 활성화돼 있는데도 상당 기간 행정을 마비시키는 국정감사 등. 무엇보다 노무현 정권에서 헌정사상 최초의 탄핵소추안 가결은 입법부가 시쳇말로 ‘권력의 끝맛’을 보는 계기가 됐다. 그 뒤 박근혜에 이어 윤 대통령까지 격대로 대통령 탄핵이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 권력 분점은 ‘견제와 균형’의 가치론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 명분에 과몰입한 나머지 우리가 잃어버린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국정 운영의 효율과 책임이다. 대통령이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여소야대에 따른 입법 교착을 겪지 않고 소신 국정을 펴기 위해선 4년 중임제와 대선·총선의 동시 실시가 전제돼야 한다. 이를 위한 개헌 논의는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 그러나 그간 무수한 개헌 논의가 일정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한 것은 개헌론이 대부분 불리한 정국 타개용으로 제시된 탓이다.
이 대목에서 헌법학자 서희경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의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개헌은 내용보다 개헌 일정을 합의할 수 있느냐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개헌 스케줄, 새 헌법에 따른 대선 시기,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대통령 임기 단축까지 포함해서다. 대통령 임기 단축은 대선·총선 시기 일치를 위해선 한 번은 겪어야 할 희생이다. 헌정 질서의 대혼란을 겪고 있는 지금이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 있다. 기정사실화된 윤 대통령 탄핵 이후 대선에서 개헌 일정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병행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대선에서 임기가 단축되는 대통령은 새 헌법에서 1회에 한해 출마 기회를 부여하는 등의 보완책도 생각할 수 있다.
87체제의 권력 구조는 이제 시한을 다했다. 책임정치를 위한 한국형 방법론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과점화된 정치 틀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기존 정치인에게 의존해서 될 일이 아니다. 불량 정치 상품으로 피해를 보는 정치 소비자 국민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K의 재진격을 위한 집단지성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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