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10일(현지시간) 제35차 한미재계회의가 열린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옆 미국상공회의소. 찬 바람이 불다가 빗방울이 조금 흩날리기도 하는 날씨였다.
행사장 앞에서 만난 에번 그린버그 미한재계회의 위원장(처브그룹 회장)은 말을 붙여보기도 전에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고 지나쳤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측 참석자든, 미국 측 참석자든 인사조차 꺼리면서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비공개로 열린 행사는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차단하고 보안검색과 신원 확인에 신경을 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갑작스레 벌어진 비상계엄 사태가 한미재계회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행사 전날인 9일 만찬을 겸한 리셉션 행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한국의 시국을 고려해 이를 취소했다. 편안히 웃고 즐기는 시간을 갖기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 측에서는 한국경제인협회 회장단 중 류진 풍산그룹 회장을 비롯해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이장한 종근당 회장, 성래은 영원무역그룹 부회장이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4대그룹에서는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을 제외하면 윤영조 삼성전자 부사장, 김동욱 현대자동차 부사장, 폴 들라니 SK아메리카 부사장 등 부사장급이 자리를 지켰다. 이외에 마이클 스미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미국법인 대표가 양국 경제협력에 관한 발표를 맡았다. 미국 측 참석자는 그린버그 회장 외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행사장 안에서 양국 경제인은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협력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이들이 폐회 직전 발표한 공동 성명에는 “한국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양국 경제계를 중심으로 흔들림 없이 긴밀한 협력과 강력한 경제적 유대를 지속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어려운 여건’은 비상계엄 및 탄핵 사태를 이르는 것으로 해석됐다.
또 이들은 한국이 미국 내 외국인 직접투자 주요국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그간 780억달러 이상을 투자해 8만8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밝혔다. 이어 “글로벌 무역체제를 지지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준수하며, 규칙에 기반한 무역과 투자를 촉진한다”는 내용을 넣었다. 트럼프 정부를 향해 한·미 FTA를 흔들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예정된 주요 행사는 대부분 취소됐다. 공무원 공기업 공공기관 관계자들은 ‘한국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며 바짝 엎드리는 게 가장 큰 목표가 됐다.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은 점심 약속을 포함해 상당수 일정을 취소하고 외부 행사 참석을 중단했다. 12일 할 예정이던 KOTRA 주최 송년회는 신년 이후로 기약 없이 미뤄졌다. 민간 기업들도 모든 미팅에서 한국 상황을 거듭 설명하는 데 지쳐 있다.
이날 한미미래재단(KF) 행사에서 만난 여한구 피터슨경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전 통상교섭본부장)은 “기업 인수합병(M&A)은 미뤄지고 비즈니스 미팅도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며 “탄핵 추진 상황이 한국 경제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시각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각종 정책이 차기 정부에서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투자를 고려하고 협력을 검토하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트럼프 정부와 대화할 사람이 없어진 것이 큰 문제라고 했다. 여 위원은 “트럼프 2기는 모든 나라를 상대로 관세 그물을 친 다음 협상을 통해 면제해주는 식이 될 텐데, 선장 없는 한국은 대응할 때를 놓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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