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통에 코를 박고 [김홍유의 산업의 窓]

입력 2024-12-19 11:41   수정 2024-12-1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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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여물통에 코를 처박고 먹고 있을 때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지 않는다. 먹느라 정신이 없다. 가끔 숨을 쉬려고 고개를 들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먹고살 때는 모두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간다. 아뿔싸 하는 순간 많은 것이 변해 왔다.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의 자유와 시장경제, 민주주의 발전 과정이다.

한쪽 면을 펼치면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경제의 기적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쪽을 펼치면 민주주의 어두운 면인 독재와 착취,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역사의 앞장과 뒷장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우리에 남겨진 그 무엇이 있다. 바로 좋은 제도와 올바른 가치를 존속시키는 일이다.

천년 동안 농업 국가로 지독히 가난했던 한 나라가 한 세대 만에 현대적 산업국가로 발돋움했다.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처럼 늘 감동적이며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숨겨진 역동적 에너지가 있다. 구한말 게으르고 굼뜬 민족이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역동성으로 변화되었다. 산업화한 국가에서 여행 온 사람이 농업 기반 1차산업의 국민을 바라보면 굼뜨고 게으르고 무지하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다. 당연하다. 단위 시간당 생산성 개념보다는 하늘이 주는 대로 순응적 삶을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는 시간의 개념은 무한한 것이다.

한 세대 만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바뀌었다. 느림에서 빠름으로, 빠름을 지나 ‘빨리빨리’로 거듭됨에 따라 성장 속도도 빨라졌다. 하지만 좋은 제도는 ‘빨리’의 그림자가 되어 함께 가지 못하고 뒤처지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경제는 모델이고 과학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국민이 원하기만 하면 바꿀 수 있다는 발목이 되었다. 영국 기자 마이클 브린은 “한국에서는 어떤 쟁점에 대한 대중의 정서가 특정한 임계질량에 이르면 앞으로 뛰쳐나와 모든 의사결정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야수로 변모한다. 한국인들은 이 야수를 ‘민심’이라고 부른다. … 이 야수는 집단적 영혼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며 누구든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1987년에 거리 시위로 성취되었으며 그 이후로 민주주의의 개념은 법의 통치가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노벨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임 대통령이 ‘국민이 하느님이다’라고 할 정도였을까? 탄핵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지금의 현실에도 여전히 이러한 믿음은 막강하게 진행되고 있다. 여기저기 공동체를 위한 이야기보다는 좀 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목소리밖에 없다. 포퓰리즘이 마구 쏟아져도 여물통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소처럼 누구 하나 고개를 들고 경종을 울리는 권력자는 없다. 진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모호한 이념만이 난무한다. 그렇게 해야만 성난 야수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좋은 가치와 제도를 만들기는 어렵지만 망가뜨리기는 쉽다. 전쟁에 희생당한 수많은 분이 있었기에 자유라는 가치를 지킬 수 있었고 한 세대 만에 굶주림에서 벗어나 최고의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실용 정신으로 무장한 기업가와 엔지니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며, 우리뿐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잘 맞지 않는 민주주의라는 프로세스를 안착시키기 위해 말 없는 다수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SNS의 주제가 정치 이야기로 채워지고 모든 국민이 권력 지향적으로 된 것은 ‘야수’의 무서움도 있지만, 달콤함도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는 여물통에 코를 처박지 말고 가진 부에 자신감을 갖자. 피해의식 희생자 프레임에서 탈출하자. 우리나라가 유럽에 있었다면 영국, 프랑스, 독일에 못지않은 강국이 된다. 지리적 위치가 유럽이든 동아시아에 있든 중소강국이 맞다. 중소강국에 알맞은 위엄을 갖자. 그런 마음으로 자유와 시장경제 민주주의를 바라볼 때 지금의 많은 문제의 원인이 제대로 보인다. 가진 자의 여유로 토론하고 다듬고 만들어도 늦지 않다.

김홍유 경희대 교수(한국방위산업협회 정책위원, 전 한국취업진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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