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한국 계엄에 탄식 터진 美 빅테크

입력 2024-12-16 17:46   수정 2024-12-17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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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면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많은 ‘밍글링(mingling)’이 열린다.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뜻의 밍글링은 실리콘밸리 특유의 수평적 기업 문화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행사다. 이곳에선 최고경영자(CEO) 등 이른바 ‘C레벨’의 주요 경영진이 기자 및 애널리스트를 초청해 술, 음료 및 핑거푸드를 즐기며 격의 없이 어울린다. 스포츠 같은 가벼운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곳곳에선 송곳 같은 질문과 솔직한 대답이 오가기도 한다. CEO가 자사 콘퍼런스콜에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다.
쏟아진 韓 계엄·탄핵에 대한 질문
지난 며칠간 연이어 열린 밍글링에 대한 기대는 컸다. 빅테크 CEO들과 짧게나마 지근거리에서 대화할 드문 기회여서다. 친분을 쌓고 향후 인터뷰할 기회가 마련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런 야심 찬 기대는 번번이 예상을 빗나갔다. 질문할 틈도 없이 한국의 비상계엄과 탄핵에 대한 질문이 역으로 쏟아져서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한국의 정치 상황에 취재하러 갔다가 취재당하고 돌아오기 부지기수였다.

한 기업 CEO에게 한국 특파원이라는 소개를 건네자 “엄청난 혼돈의 나라에서 왔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 비상계엄 뉴스를 봤을 때 정말 두 ‘코리아’ 중 ‘사우스 코리아’를 말하는 게 맞는지 의심했다”는 다른 기업 CEO의 말에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 외신 기자가 “한국은 내가 아는 나라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나라 중 하나인데, 다른 한쪽에서 군인들이 국회에 진입하는 모습이 펼쳐진다는 게 충격적이었다”고 말하자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이들의 관심은 단순히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영화보다 영화 같은 일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한 기업의 임원은 “그동안 윤석열 정부와 대화를 나눈 규제 완화와 같은 일은 순식간에 없던 일이 되는 것이냐”고 우려했다. “정권 교체가 되면 규제 완화는 완전히 물 건너갔다고 봐도 되느냐”는 질문도 이어졌다.
한국의 '예측 불가능성'
실리콘밸리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우려하는 것은 ‘예측 가능성의 부재’다. 가뜩이나 5년에 한 번씩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정책 기조가 크게 바뀌는데, 지난 2년여간 윤석열 정부와 진행해 온 많은 협상은 아예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가장 컸다. 제아무리 빅테크라도 한국 시장에서는 한낱 하나의 외국 기업일 뿐인데 한국 정치의 예측 가능성이 너무 떨어져 사업 방향을 잡기 어렵다는 푸념도 이어졌다.

자국 우선주의를 기치로 내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귀환은 세계정세에 예고된 거대한 쓰나미와 같다. 각국은 그동안 자국 기업이 해일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거대한 경제외교의 방파제를 쌓아 왔다. 그러는 사이 윤 대통령은 쓰나미가 닥치기 직전 그나마 쌓고 있던 둑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건 물론, 자체적인 소용돌이까지 만들어냈다. 한국에 진출한 해외 기업,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 모두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방향을 잃고 허우적대고 있다. 그런데도 이제 조타수가 돼야 할 국회는 여전히 “여당이 있다, 없다”와 같은 예송논쟁만 하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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