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재계 인사이드] '대만 반도체 커넥션'을 만든 힘

입력 2024-12-17 17:40   수정 2024-12-1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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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창 TSMC 창업자가 얼마 전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삼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중 유독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대만을 ‘반도체 항공모함’으로 만든 노회한 테크니션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메모리 사업을 하고 싶어 했고, 혼자서는 할 수 없으니 협력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들은 게 아니라 뉘앙스를 짐작하긴 어렵지만 그의 말에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담긴 것 같았다. 삼성에 대한 오랜 콤플렉스와 삼성을 마침내 이겼다는 우월감.

모리스 창이 두루뭉술하게 ‘협력’이라고 표현한 건 사실 ‘취업 제안’에 가까웠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전한 후일담에 따르면 이 회장은 모리스 창에게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로 오라고 요청했다. 1983년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며 반도체 진출을 선언한 삼성은 IBM 등을 거친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을 1985년 영입했다. 글로벌 인재가 너무나 절실한 때였다. 그중 핵심 인물이 모리스 창이었다. 모리스 창이 TSMC를 창업한 해가 1987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언급한 이 회장의 제안은 TSMC와의 협력이 아니라 모리스 창 개인을 향한 러브콜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인재를 알아본 이건희의 안목
1985년 무렵의 모리스 창은 삼성의 제안이 솔깃했을 것이다. 당시 삼성은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일본 반도체 아성을 무너뜨릴 최강 ‘스타트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안정적인 취업 대신 창업을 택했다.

모리스 창의 결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대만의 2대 총통인 장징궈였다. 대만은 1985년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 육성을 발표하며 모리스 창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정부가 돈을 대지만 TSMC 운영의 전권을 모리스 창에게 위임하기로 약속했다. 평생을 공산당과 싸우는 데 바친 장제스의 아들인 그가 반도체 기술과 관련 산업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장 총통은 국가가 가야 할 방향과 사람을 보는 안목만큼은 탁월했던 것 같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위협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할 구세주를 반도체 산업에서 찾았다. 모리스 창과 대만 정부의 합작품이 탄생한 1987년, 장 총통은 무려 38년간 지속된 대만의 계엄령을 해제했다.
장징궈의 설득에 조국 택해
창업 이후 TSMC의 ‘모토’는 두 가지였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와 ‘삼성 타도’다. 누구나 드나들며 볼 수 있는 타이베이 본사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이런 현판을 걸어놓고 모리스 창은 삼성을 향해 칼을 갈았다. 이후 스토리는 모두가 아는 바다. 모리스 창은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리사 수 AMD 사장과 함께 ‘대만 반도체 커넥션’을 이끌며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석권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공지능(AI) 산업을 움직이는 실세가 이들 대만 3인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폭스콘, 콴타 등 TSMC의 신조를 뒤이은 대만의 전자 기업들은 고객이 원하면 무엇이든 만들어준다는 모토를 내세우며 글로벌 IT 산업의 요로를 장악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인재를 최우선으로 삼은 리더들이 종종 등장해 시쳇말로 나라를 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과학 강국을 만들기 위해 KAIST와 KIST를 창설할 때 재미 한인 과학자들에게 직접 손편지를 쓴 일은 지금도 회자되는 일화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를 정부효율부 수장에 앉히며 ‘관료제 혁파’ 임무를 맡긴 것도 ‘신의 한수’로 불린다. 상하이에 테슬라 기가팩토리를 보유한 머스크는 무역 전쟁 중인 미·중을 잇는 숨은 반전 카드일지 모른다.

국가 리더의 결정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처럼 나라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차기 리더는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고 곁에 둘 수 있는 인물이 됐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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