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 등 거의 모든 사안에 포퓰리즘으로 기울었던 금융당국이 모처럼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 늘 산업의 금융 지배가 이슈였지만 이제 정반대다. 금융자본의 전방위 공습에 기업이 속수무책이다. MBK파트너스의 고려아연 공격이 잘 보여준다. 세계 1위 비철금속회사의 운명이 금융자본 손에 달려 있다. 론스타 같은 토종 ‘먹튀’ 자본도 우후죽순이다. 먹튀 후 주가 급락과 경영 위축에 따른 손실은 고스란히 소액주주와 시장 몫이다. 공공부문도 사정권이다. 세금으로 적자를 메우는 준공영제 서울 시내버스회사 6곳이 사모펀드 휘하로 들어가 배당금 잔치 중이다.
물론 모든 금융자본이 다 문제인 것은 아니다. 구조조정을 지원하고, 멋진 바이아웃 전략으로 기업을 회생시킨 훈훈한 스토리도 많다. 하지만 단기 차익을 최우선하는 금융자본과 지속성장이 목표인 산업자본의 숙명적 충돌로 인한 파열음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금융자본 헤게모니는 실로 유서 깊은 주제다. 루돌프 힐퍼딩(1877~1941)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이 결합해 독점금융자본으로 진화한다고 봤다. ‘금(은)산 분리’ 정책의 원형적 이론이다. 금융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종말적 단계로 본 힐퍼딩의 경고는 빗나갔다. 자본주의에 내재된 혁신 DNA를 간과한 결과다. 하지만 금융발 시스템 위기가 반복 중이라는 점에서 그의 관점은 곱씹을 만하다. 금융공학의 날개를 단 금융자본은 1990년대 말 남미와 아시아의 외환위기를 불렀다. 2008년의 파국적 글로벌 금융위기도 극단적 증권화의 귀결이다.
선진국에선 금융자본 통제가 핵심 과제가 된지 오래다.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은 “나의 진정한 적은 얼굴 없는 금융”이라고 선언해 큰 반향을 불렀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약육강식의 월스트리트 법칙에 맞서겠다”고 했다.
한국에선 금융자본 논쟁이 미미하다. 초일류로 성장한 산업자본의 아우라가 커서일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감행한 초유의 통화팽창 정책을 기점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막대한 유동성을 충전한 금융자본은 일순 기업경영권을 맹공격하고 나섰다. 우호적·보완적이었던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관계도 적대적·약탈적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금호석유화학 동부 현대 두산 등이 최근 1~2년 새 거센 공세에 시달렸다. 특히 작년 MBK파트너스의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그룹) 공격은 큰 쇼크를 안겼다. ‘아시아 최고’를 자처하는 거대자본도 저급한 행동주의 펀드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해서다. ‘사모펀드(PEF) 빅3’의 총약정액만 30조원이 넘는다. 상장사 수백 곳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을 끌어들이면 삼성 등 4대 그룹 경영권도 가시권이다.
3년 전 ‘기관전용 사모펀드’ 도입이 변화의 기폭제가 됐다. 레버리지 확대(10%→400%), 10%룰 해제 덕분에 지분 1% 확보 후 ‘치고 빠지기’는 여반장이다. 여러 펀드가 연합하는 울프팩(늑대무리) 공격도 일상화됐다.
금융·산업자본 간 필연적 모순은 탈산업화를 부른다. 세계를 호령했던 미국 제조업 상징 러스트벨트의 쇠락이 방증이다. 금융은 경제 혈관이고 고도 자본주의에는 선진금융이 필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소를 키우는’ 주력은 제조와 산업이다. 뒤늦게 리쇼어링(공장 유턴)에 전력투구하는 미국, 제조업에 목숨 건 중국의 성공이 잘 보여준다.
산업자본 홀대, 금융자본 우대는 방향 착오다. 외부감사도 안 받은 금융자본이 수두룩하건만 산업자본은 사돈의 팔촌이 산 땅 한 평만 공시 누락해도 제재다. 몇몇 대주주의 일탈을 ‘산업자본=악’으로 일반화하는 빗나간 풍조에 정부마저 맞장구다. 희대의 라임·옵티머스 사태에서 보듯 금융자본 일각의 비도덕성이야말로 족탈불급이다. 이제 의결권 제한은 산업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에 더 필요한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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