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 후 시민들에게 지원금을 나눠주겠다는 지방자치단체가 하나둘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민생이 어려운데 계엄 사태까지 터졌으니 소비 촉진으로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명분입니다.
그러나 이미 코로나19 때 이러한 정책이 '고물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웃하고 있습니다. 이미 높아진 물가를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게다가 과거 코로나19 때 지원된 금액 중 상당수가 부정 수급됐다는 점에서 무분별한 현금 살포가 국가 재정을 더 파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우려를 키웁니다.
한경 혈세누수탐지기(혈누탐)팀이 이번에는 계엄 사태 후 시작된 지자체의 '재정 살포' 정책 경쟁을 들여다봤습니다.
전북 정읍시는 지난 15일 시민 전체에게 30만원의 '민생회복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지원 대상은 11월 말 기준으로 정읍시에 주민등록상 주소가 등록된 모든 시민입니다. 결혼이민자와 영주권자 포함 10만2647명입니다. 지원금은 총 309억8800만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됩니다.
경기 광명시는 대통령 탄핵 정국 민생 위기 극복을 위해 '소비 촉진 지원금' 지급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민 혹은 세대별로 일정액을 지급해 지역 내 시장 상권 등에서 사용할 수 있게끔 하는 방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유력한 지원금 액수는 10만원이 거론됩니다. 세대별로 지급할 경우 전체 소요 예산은 114억원, 개인별로 지급할 경우에는 277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됐습니다.
김제시는 지난 11일 전북도-기초자치단체 경제부서장 긴급회의에서 민생회복지원금 확대를 제안했습니다. 전북도와 시·군이 재원을 마련해 시민 전체에게 일정액의 지원금을 지급하자는 겁니다.
전북 남원시는 시민 전체에게 민생안정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의회와 협의해 민생 조례의 제·개정과 예산 편성 등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랍니다.
일부 지자체는 "우리가 최초"라고 보도자료에 명시하며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지원금 지급을 자랑했습니다.
모든 재정 정책이 그렇듯, 취지야 나쁘지 않습니다. 박승원 광명시장은 "탄핵 시국이 민생경제를 차갑게 얼리고 있다"면서 "연말 모임조차 실종돼 소상공인들이 코로나19 때보다 더 어려워하고 있다. 공직사회가 조용하고 차분하게 골목상권 활성화에 힘을 보태주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박 시장은 17일 소비 촉진 지원금에 대해서도 "시 단위에 그치지 않고 경기도 도민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고도 제안했습니다.
이학수 정읍시장은 "내수경기 침체 속 민생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비상계엄령 발표로 인해 소상공인들이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게 됐다"면서 "지역사회에 온기가 돌고 막힌 경제를 뚫어 골목상권의 숨통을 트이게 하려면 강하고 긴급한 처방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불필요하게 나가는 지출을 줄여 국민에게 세금을 되돌려주고 소비를 촉진하겠다는 구상입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들이 올해 초부터 촉구한 '전 국민 25만원의 민생회복지원금' 정책이 지자체에서부터 시작된 격입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당 차원에서도 지원금법을 염두에 둔 발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6일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 됐지만 해결해야 할 일은 첩첩산중"이라며 "내수 활성화 입법을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원금법에 불씨를 지피듯 "민생 경제 회복을 위한 입법 추진을 신속히 해야 한다"라고도 재차 강조했습니다.
앞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총선 공약으로 '지역사랑상품권 방식으로 1인당 25만~35만원 지급'을 내세웠던 것을 떠오르게 하는 발언입니다. 민주당은 22대 국회 들어 1호 당론 법안으로 25만원 지원금법을 추진했으나 재표결 끝에 최종 폐기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정책을 반기는 여론도 적지 않습니다. 내수가 워낙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까지만 해도 민생회복지원금에 대한 반대 여론이 더 높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찬성이 더 많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체감경기가 어렵다는 얘기로도 해석됩니다.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은 인플레이션 유발은 제한적이고, 오히려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채은동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5월 13일 발표한 브리핑 자료에서 "13조원의 민생회복지원금 시행 시, 소비 효과에 의한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0.2~0.4%포인트 발생한다"며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소득 하위계층의 소비 효과가 크게 발생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벌써 우려가 큽니다.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따라서 지원금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뿌린 돈에 비해 내수 활성화 효과가 미미할 가능성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펜데믹 때 문재인 정부가 실시한 재난지원금 대책이 그랬습니다. 국책연구원인 한국개발연구원(KDI)는 지난 2020년 '코로나19 1차 긴급재난지원금 정책의 효과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사용 가능 업종에서 재난지원금을 통해 증대된 카드 매출액이 정부가 투입한 예산 14조원의 약 30% 수준인 총 4조원 규모에 그쳤다고 발표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정책은 물가를 교란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왔습니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지난 5월 현안 분석에서 국민 1인당 25만원을 지급하는 내용의 민주당 특별조치법에 대해 "결국에는 우리가 이때까지 물가를 잡기 위해서 내수 부진의 고통을 감내한 것을 되돌려 다시 고물가로 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근거로는 물가 상승을 소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제시했습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일률적인 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은 들어가는 예산 대비 소비 진작 효과가 크지 않다"며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지원금을 주는 것이 지자체 소비 활성화 효과에 더 클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명예교수는 "정치적 불안정성이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것은 맞다"면서도 "지자체가 지원금 지급 등 정책을 추진할 때는 지원금 사용처를 명확하게 제한하고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현 시국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이 지원금을 사용하게끔 유도해야 한다"며 "상권 활성화 효과는 못 보고 세금만 축내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받을 때만 잠깐 기분 좋고, 시간이 지나면 공동체가 함께 갚아야 하는 고통의 영수증. 이미 충분히 맛보지 않았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신현보/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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