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이 마음먹은 그대로 이뤄질 수는 없다. 사소한 실수가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고 생각도 못 한 돌발 상황으로 판 자체가 달라진다. 내가 망해야 행복한 사람들의 음해와 모략으로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다. 세상은 나름의 복원력을 갖고 있어서 시간이 가면 균형을 되찾고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얻은 피해는 개인이나 기업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다.
아둔한 경영학 교과서에서 고작 ‘불확실성’, ‘환경 적응’ 운운하는 노곤한 소리로 짜증을 더하는 사이 ‘위기관리’라는 분야가 대안으로 부각됐다. 변화무쌍한 정치가 국민정서법에 힘입어 개인과 기업의 생사를 좌우하는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각별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유럽의 전쟁과 미국 대통령 선거까지 직접 영향을 받는 처지에 그 내용도 날로 복잡하고 글로벌하게 진화하고 있다. 잘못한다고 당장 망하지는 않고 잡혀갈 일도 없는 마케팅, 인사관리와는 차원이 다르니 절실할 수밖에 없다.
위기관리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매뉴얼들이 나와 있고 전문적 서비스도 자리 잡고 있다. 대형 로펌들도 주요 업무영역으로 삼아서 정치, 법률, 언론 분야의 전문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인터넷에서 찾으면 다 나오는 내용을 옮길 일은 아니고, 딱 한 가지 선제적 대응과 지연전술 사이에 숨은 경영자의 고민을 생각해 보겠다.
작은 불씨 하나가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기름을 부어대면 불은 더 켜진다. 자금경색 소문이 나오면 빚 떼일까 몰려드는 채권자들로 멀쩡하던 회사도 흔들리는데, 이 와중에 그럴듯한 루머를 퍼뜨리고 공매도를 걸면 단기차익을 얻을 수 있다. 투자나 계약을 앞둔 사업 파트너는 이런 상황을 건수 삼아 턱없는 조건을 강요한다.
위기는 언론 사업의 호재다. 사람들의 걱정과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위기관리를 돕는 전문가들에게도 일거리를 제공한다(재벌 회장이 입건되면 본인 이외의 모든 사람이 속으로 좋아한다는 얘기도 있다). 위기가 호재인 사람이 많을수록 작은 불씨도 산불로 만드는 동력이 마련된다. 신속한 상황 파악과 선제적 대응으로 위험요인을 관리해야 한다.
세상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람들은 주어진 사실을 맥락과 의미를 헤아리며 스토리로 이해한다. 사람들끼리 서로 부딪히며 공유한 스토리는 주도적 담론이 되어 거스르기 불편하다. 정파적 의도와 동원이 더해지면 더욱 어렵다.
이렇게 서사(narrative)의 구조가 단단하게 자리 잡으면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스토리로 서사의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지 파악해서 그 구조를 바꾸는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대체적 스토리를 제공하고 설득해서 판을 바꿔야 한다.
A그룹의 대주주 경영자인 K 회장은 최근 대형 정치 스캔들에 휘말려 곤혹스럽다. 계열사 합병 과정에서 대주주에 유리하도록 부당한 지시가 있었고 이에 대한 조사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정치권과의 거래가 있었다는 혐의다.
탁월한 정보력과 상황 대응으로 유명한 A그룹은 적극적 언론 대응과 함께 관련 기관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A그룹이 세상을 쥐고 휘두른다’고 믿는 상황에서 수사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단편적 정황들은 애써 도와주던 사람들마저 움츠러들게 만든다.
‘A그룹은 남다르다’는 생각이 ‘세상을 쥐고 휘두른다’는 음모론으로 진화하면서 독(毒)이 된 것이다. 최고경영진이 우호적 보도와 전문가 집단의 칭송(혹은 아첨)에 취한 사이에 직원들은 기발한 묘수풀이로 충성 게임에 나서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여겨 저지른 일이 대형 사고가 되어 버렸다.
A그룹 사람들은 단편적이고 과장된 루머에 휘둘리는 어이없는 여론구조를 탓한다. 하지만 달라진 세상에서 힘센 사람들 찍어서 관리하던 방식은 한계가 있고, 온 세상 사람을 쫓아다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토크 방마다 읍소하고 틀어막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 A그룹을 공격하면 강대한 지배자에 맞서는 선한 영웅이 되는 구조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는 어렵다.
위기의 본질은 ‘거악(巨惡)의 서사’가 굳어지는데도 세상 만만하게 알고 해 먹기와 충성 게임을 계속한 아둔함이다. 엄격한 관리와 감사, 전방위적 점검과 대응은 힘없는 직원들만 괴롭히는 고비용 권력 놀이가 됐다. 진정 유능하다면 달라지는 세상을 읽고 이젠 안 되는 일을 빨리 가려내고 드러난 잘못은 인정하고 잘라내는 것이 낫다. ‘부족함을 반성하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다짐이 판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섣부른 대응은 상황을 덧나게 만든다. 위기라고 허둥대며 아무 데나 찔러보고 밥값 하라며 직원들 몰아대면 작전세력의 만만한 먹거리가 된다. 선제적 대응으로 가닥을 잡고 방어선을 쳤다면 시간을 두고 문제의 속사정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내적 모순이 극대화될 때 문제의 구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편적이고 과장된 루머에 휘둘리는 여론구조가 원망스럽다면 섣부른 대응보다 ‘망각의 시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정적인 서사구조가 단단하게 굳어져 있지 않다면 사람들의 들뜬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 특히 그렇다.
M사는 생산판매 중인 화학물질의 독성 논란 때문에 민형사 소송과 함께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평소 ESG 경영의 선도자로 자처하던 입장에서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인 경영진은 신속 대응에 나섰다. 사외이사들은 기업과 경영자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취업 시장에서도 선호도가 떨어졌다며 적극적 평판 관리가 필요하다고 재촉한다.
이런 호들갑에 휘둘려서 어설프게 해명에 나서고 기업 이미지 광고를 내면 오히려 부정적인 정보들을 상기시켜 역효과를 낸다. 볼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광고나 우호적 기사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될 수도 없고 사람의 생각이 그리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오히려 부정적인 내용을 상기시킬 수도 있다. 검색으로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안 보면 좋을 내용까지 고스란히 노출된다. 섣부른 해명은 민형사 소송에 고스란히 부담으로 작용한다.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위기가 진정되기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것은 어디에나 통하는 상식이다. 응급수술에 이어 경과를 보고 2차 수술과 치료 재활을 하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이런 상식이 어렵다. 경영자가 겁쟁이라서, 혹은 눈치 볼 곳이 많아서 한 대도 안 맞으려 몸을 빼기 때문이다. 겁먹은 경영자에겐 당장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 급한(혹은 영악하게 틈을 노린) 직원이 충신으로 보인다.
유능한 경영자는 위기의 성격이 변하는 변곡점을 찾아 과감하게 전략을 바꾼다. 세상을 탓하며 맞서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생각과 배경을 이해하고 대체적 스토리로 서사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순의 구조를 찾아내고 나설 시점과 방법을 정한다. 존경받는 기업과 경영자가 어렵다면 ‘잘못은 했지만 쓸 만한 머슴’으로 방향을 바꾼다.
현대 창업자 정주영 회장은 정치권과 여론의 비난에 시달리면서 고향 마을에서도 눈은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쓸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기사에는 눈이 굳기 전에 길은 터놓으라는 얘기까진 전하지 못한 모양이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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