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소한다던 K-디스카운트는 어쩌다 ‘곱빼기’가 됐나 [2024 증시 결산]

입력 2024-12-27 08:44   수정 2024-12-2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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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포커스]


말 많고 탈 많았던 한국 증시가 12월 30일 폐장한다. ‘밸류업’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성대한 포문을 열었던 2024 한국 증시는 ‘상고하저’의 흐름 속에서 결국 코스피 2400~2500의 박스권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밸류업 추진부터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행동주의 펀드와 연기금의 움직임까지 2024년 K-증시를 돌아보고 이 안에 담긴 메시지를 정리했다.
상고하저 장식한 대통령?
“임기 중 자본시장 규제 혁파를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

투자 달력의 첫 장도 끝 장도 대통령이었다. 2024년 1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거래소 서울 사옥에서 개최된 ‘2024년도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을 찾아 “대한민국에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세계적 기업이 많지만 주식시장은 매우 저평가돼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현직 대통령이 증시 개장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이날 상승장을 뜻하는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를 추진하겠다는 깜짝 발표도 했다.

그러나 깜깜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총선을 두 달 앞두고 금융시장 정책 성과가 보이지 않자 코스피와 코스닥 모두 약세 흐름이 이어졌다. 1월 한 달간의 코스피지수 하락률은 5.96%. 8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날이 파란색이었고 지독한 박스피의 시작이었다.

2월엔 금융투자업계 초미의 관심사였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세부 계획이 발표됐다. 베일을 벗은 밸류업은 시장의 기대와 달리 구체적이지 않고 강제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밸류업을 재료로 그간 급등했던 저PBR(주가순자산비율) 종목들은 발표 이후 오히려 변동성이 커졌다.

‘맹탕’, ‘밸류다운’의 비판과 달리 시장의 기대는 꺾이지 않았다. 최종안이 아닌 만큼 기대를 접기엔 이르다는 시각이었다. 저평가된 한국 증시에 외국인의 기대감도 컸다. 2월 한 달간 유가증권시장 내 외국인 순매수액은 7조8086억원. 월별 기준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1998년 이래 가장 큰 규모였다. 마침 해외에선 미국 증시의 상승장을 주도한 ‘매그니피센트 7’(M7)의 영향력이 줄어들 때였다. 용어의 창시자로 알려진 월가의 전략가는 “M7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고 말했다. 집 나간 서학개미를 불러모으고 외국인을 끌어당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파죽지세였다. 3월 코스피지수는 2700선을 돌파했다. 2022년 4월 22일 이후 1년 11개월 만의 일이다. 밸류업 프로그램 기대감이 지수를 떠받치는 상황에서 반도체 업황 회복까지 상승 재료가 확실했다. 증권가에선 실적 개선세가 맞물려 코스피가 3000을 웃돌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김병연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그간 국내 주식시장이 다른 나라에 비해 부진했던 원인은 실적에 대한 의구심”이라며 “올해 코스피 향방의 관건은 삼성전자”라고 분석했다.

밸류업 기대에 힘입어 주주환원을 요구하는 행동주의 펀드 제안도 잇따랐다. 금호석유화학, 고려아연, 다올투자증권 등 주총을 앞두고 주주제안이 쏟아졌다. 한편에선 채권으로의 머니무브도 차츰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를 기대하는 발 빠른 투자자들이 채권 가격 상승에 베팅한 움직임이었다. 일본은행이 17년 만에 금리를 올리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종료한 시점이기도 했다.
>> 정책과 시장의 간극은 위험 요소가 된다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외쳤지만 실제 정책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투자자는 정부 정책 발표 자체보다 구체적 실행력과 강제력을 주시해야 한다. 기대만으로 시장에 올라타는 것은 변동성을 키운다.
불확실·변동성의 시간
축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4월 이스라엘과 이란 간 지정학적 리스크가 불거지면서 기세가 꺾였고 1분기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다. 코스피의 시간도 벚꽃만큼이나 빠르게 졌다.

‘8만전자’에 등극한 삼성전자도 지수 하락과 함께 상승분을 빠르게 토해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점유율 1위 지위를 바탕으로 AI 바람을 탔다. 두 자릿수의 주가상승률. 삼전과 하이닉스, 지옥과 천당을 오간 롤러코스터 장세의 시작이었다.

외환시장 변동성도 상당했다. 원·달러 환율은 17개월 만에 장중 1400원까지, 엔·달러 환율은 34년 만에 장중 160엔 선을 돌파했다. 한·미·일 재무장관이 사상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 앉아 원화와 엔화의 급격한 평가절하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을 공유했을 정도다.

변동성의 시간이자 불확실성의 시간이었다. 워런 버핏 회장이 이끄는 벅셔해서웨이는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역대 최대의 현금을 쌓아두고 있었고 안전자산 금은 미·중 갈등, 중동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에 사상 최고가를 연이어 경신했다.

국내에선 하이브와 자회사 어도어 간 경영권 분쟁이 모든 이슈를 잠식했다. 상반기엔 하이브, 하반기엔 고려아연까지 ‘역대 가장 많은 경영권 분쟁이 공시된 해’였다. 2022년 한 해 동안 172건이었던 기업의 경영권분쟁소송은 올해 11월 20일까지 284건을 기록하며 100건 넘게 늘었다.
>> 불확실성의 시대, 분산 투자와 안전자산의 중요성
2024년은 외환시장과 증시의 변동성이 극심했던 한 해였다. 원·달러 환율 급등은 한국 시장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글로벌 경제가 불확실할 때는 현금 비중을 높이거나 안전자산(채권, 금)으로 분산 투자가 필요하다.
금리인하 기대감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금은 주식과 채권시장으로 흘러갔다. 박스권에 갇혀 있던 국내 증시는 삼성전자 주가가 본격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와 Fed의 기준금리 인하가 임박했다는 전망이 맞물리며 다시금 ‘3000 시대’를 기대케 했다. 채권시장은 개인의 채권 보유액이 50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개인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손꼽아 기다린 미국 금리인하의 시간은 더디게 왔다. 엎친 데 덮친 격 월가에선 그간 세계 증시의 상승장을 주도한 ‘AI’에 버블론이 제기됐다. 7월 23일 구글의 2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선 월가의 애널리스트가 “분기당 120억 달러(약 17조원)에 달하는 AI 투자가 언제부터 성과를 내기 시작할 것인가”를 물었다. 자본 지출이 예상치를 넘어선 게 이유였고 근본적으로는 AI 투자에 대한 우려였다. 챗GPT 이후 ‘AI 랠리’에 동참했던 투자자들이 슬슬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알파벳의 실적 발표 다음 날 나스닥지수는 4% 가까이 급락했다. 2020년 10월 이후 최대 하락폭이자 상승장을 기대한 한국 증시를 멈춰세운 급브레이크였다.

2024년 달력을 한참 넘긴 9월에서야 미국 중앙은행(Fed)은 0.5%포인트 금리를 인하하는 이른바 ‘빅컷’을 단행했다. 2020년 3월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대응을 위해 금리를 낮춘 이후 4년 반 만이었다. 예상치 못한 빅컷에 주요국 증시는 상승했다. 한국만이 예외였다. AI 버블론에 이어 외국계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가 SK하이닉스의 목표주가를 54% 내려 국내 반도체주가 일제히 급락한 영향이다. 증권업계에서는 모건스탠리가 반도체 업황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반론과 반도체 업황의 피크아웃(고점 찍고 하락)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 글로벌 테마와 국내 기업의 상관성에 주목
SK하이닉스는 AI 중심 반도체 테마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삼성전자는 ‘실적 의구심’을 극복하지 못해 하락세를 보였다. 글로벌 테마가 중요한 투자 기회를 제공하지만 국내 기업의 경쟁력과 시장점유율 분석이 중요하다. 특히 테마에 편승한 투자는 신중해야 한다.
폴리코노미에 갇힌 K-증시
채권시장엔 연이어 호재가 터졌다. 9월의 금리인하에 이어 10월 세계 3대 채권지수인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에 성공했다. 2022년 9월 관찰대상국(Watch List) 지위에 오른 지 ‘4수’ 끝의 성공이었다. 실제 지수 반영 시점은 1년가량의 유예기간을 거쳐 ‘내년 11월’. 그 즈음엔 단계적으로 최소 500억 달러(약 70조원)의 자금이 우리 국채 시장에 유입될 것으로 전망됐다. 시중금리와 환율 안정에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당장의 환율은 불안정의 끝을 달렸다. 중동발 리스크에 미국 경제 호조, 한국 경제의 침체, 미 대선의 도널드 트럼프 재선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대내외 시장의 모든 재료가 ‘강달러’를 가리켰다. 시장에서는 ‘1400원이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증시도 첩첩산중. 한국거래소가 코리아 밸류업 상장지수펀드(ETF) 12종과 상장지수증권(ETN) 1종 등을 내놓으며 한국 증시 소외 양상을 해소하려고 나섰지만 강력한 폴리코노미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7월 피격 사건으로 대선 레이스에서 우위를 달린 트럼프가 11월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트럼프 리스크’가 가시화됐다. ‘미국 우선주의(MAGA)’ 정책이 현실화하면 한국 수출 실적이 크게 꺾이면서 저성장의 함정에 갇힐 수 있다는 불안감에 한국 증시의 약세장이 계속됐다. 외국인은 특히 삼성전자를 집중적으로 팔아치웠다. 8월 이후 가파른 매도세에 삼성전자는 11월 4만9900원까지 내려앉았다. “올해 코스피 향방의 관건은 삼성전자”라던 애널리스트의 말처럼 대장주이자 안전자산으로 여겨진 삼성전자의 추락은 곧 코스피의 끝없는 추락이었다.

더 나올 악재는 없다고 생각했건만 투자 달력의 막장에 대미를 장식한 건 윤 대통령이었다. 그는 12월 3일 때아닌 비상계엄 선포로 한국 증시를 ‘시계제로’ 상태에 빠뜨렸다. 코스피·코스닥지수는 올해 내내 글로벌 주요국 가운데 수익률 꼴찌를 기록했다. 외국인과 개인투자자가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수천억원을 순매수하지 않았다면 ‘코스피는 붕괴됐을 것’이란 분석마저 나왔다. 더 큰 문제는 대외적 신인도의 하락이었다. 미국 경제 매체 포브스의 수석 기고자 윌리엄 페섹은 “윤 대통령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주장하는 투자자들이 옳았음을 입증했다”고 썼다. 연초부터 증시의 뜨거운 감자였던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악재로 대미를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국회는 12월 10일에서야 5000만원이 넘는 주식·채권·펀드·파생상품 등 금융투자소득에 매기는 금투세를 폐지했다. 그러나 탄핵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책 효과는 시장에 반영되지 못했다.

>> 정치적 리스크는 시장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클 때는 리스크 관리가 필수다. 정치적 혼란이 장기화되면 글로벌 자본이 한국 시장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기관과 외국인의 움직임을 면밀히 파악해야 한다. 특히 외국인의 움직임은 시장 방향성을 좌우한다. 지속 가능성을 판단하려면 글로벌 증시와 연계된 자금 흐름을 분석하자.

2025년 증시 전망도 불투명하다. 2024년 한국 증시를 가둔 ‘폴리코노미’가 2025년에도 시장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1월이면 ‘트럼프 쇼크’를 몰고 올 트럼프 시대가 열린다. 증시 전문가들은 내년 시장의 최대 위험 요인으로 트럼프발 무역전쟁 가능성을 꼽았다. 미 증시 변동성이 확대되며 지난 8월 초 주가지수 급락과 같은 충격이 많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때마침 Fed도 12월 19일 올해의 마지막 추가 금리인하를 단행하며 내년 금리인하의 속도조절을 시사했다. 이유는 경제 불확실성이다.

대외 변수도 상수인데 한국의 정치 상황도 다시금 2017년의 탄핵 정국으로 돌아갔다. 그해에는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야 박스피에 머물던 주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정치적 혼란이 매듭지어졌다는 점에서 훈풍이 찾아온 것이다. 정치적 불확실성과 경제적 하방 리스크는 투자자들에겐 ‘위기와 기회의 공존’이다. 증권사의 ‘2025년 코스피 밴드’는 최소 2250(iM증권)에서 최대 3124(SK증권)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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