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처럼 쌓은 물감… 희미한 그림에서 이웃의 냄새가 난다

입력 2024-12-23 10:13   수정 2024-12-26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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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연 작가(43)가 그리는 도시는 특별하지 않다. 랜드마크도, 잘 관리된 공원도 없다. 성냥갑처럼 빼곡히 들어선 낡은 아파트가 대다수다. 출근길마다 마주치는 별 볼 일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두껍게 쌓아 올린 물감 냄새엔 도시인의 애환이 배어 있다.



작가의 개인전 '바라보다-제주'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된 회화 20여점은 서울 잠실과 강남, 여의도, 한남 등지의 평범한 일상을 담았다. 전부 작가가 수년간 머물며 지낸 곳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쳇바퀴 같은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이웃을 바라보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생활을 오래 해본 이들이라도 지역을 쉽사리 알아챌 순 없다. '같이 바라보다' '그 빛을 보다' '먼 곳을 바라보다' 등 모호한 제목이 작품마다 붙었기 때문이다. 지명에 대한 선입견을 관람객한테 강요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 각자 동네에 얽힌 기억을 투영해 감상하면 된다는 얘기다.



크게는 300호에 이르는 그의 작품은 멀리서 봐야 진가가 드러난다. 가까이 서면 색들이 뒤엉킨 추상으로도 보인다. 캔버스 위로 0.5㎝가량 볼록 솟은 물감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모습이다. 아파트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여러 재료를 섞어 만드는 시멘트와도 닮았다.

이런 독특한 질감의 배경에는 아크릴 물감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제작 과정이 있다. 작가는 밑그림을 그린 뒤 똑같은 그림을 3~4회 덧칠하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두꺼운 물감층 사이로 삐져나오는 이전 단계의 그림이 오묘한 색감을 내는 비결이다.



작가가 물감을 축적하는 형식을 시작한 건 대학 재학 시절이던 2000년대 초반부터다. 반투명한 종이 여러 장에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고, 이를 포개면서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초기작을 내놨다.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시각 차이를 한 번에 담고 싶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지난 20년 동안 고집한 도시 풍경에도 이러한 철학이 반영됐다. 작가가 태어난 서울 성북구가 시작이었다. 이어 유년기를 보낸 잠실, 작품 활동을 위해 자주 찾던 서촌 등으로 소재를 넓혔다. 작가는 "층층이 쌓아 올린 풍경화엔 이웃들이 바라봤을 서로 다른 도시의 모습이 투영됐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최근 행선지는 제주도였다. 전시장 1층엔 지난겨울 가족과 함께 한달살이에 나선 제주의 풍경을 옮긴 신작들이 걸렸다. 이전 작품들과 달리 쨍한 색감이 두드러진다. 한라산이나 주상절리 등 특징적인 장소는 없다. 작가가 숙소 창밖으로 바라본 평범한 어촌 풍경을 겹겹이 쌓았을 뿐이다.

전시는 내년 1월 4일까지다.



안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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