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우리가 싸워 지켜야 할 대상은 프랑스뿐 아니라 샴페인임을 명심하세요!”
윈스턴 처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소집을 명령하면서 선언한 말이다. 쾌락과 축제의 술, 수세기에 걸쳐 가장 화려하고 관능적인 상징이 된 음료 샴페인. ‘위스키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처칠의 지독한 샴페인 사랑은 전쟁을 끝내야 하는 그 엄중한 순간에도 숨길 수 없었다.
‘펑’ 소리와 함께 코르크가 솟아오르면 병 안의 압력이 빠져나오며 약 100만 개의 거품을 만들어낸다. 이 거품들은 혀를 자극하고, 몸 안에서 춤추며 빠르게 혈관과 뇌로 도달한다. 파리에서 동쪽으로 56㎞ 떨어진 마른강 골짜기에서 시작해 다섯 개의 광활한 광역시에 걸쳐 있는 샹파뉴 지역. 여기엔 샴페인 생산권을 가진 마을 319곳이 있다. 전 세계 모든 발포성 와인 중 엄격하게 통제된 고유의 방식으로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된 것만 샴페인이라고 부른다. 거품이 난다고 해서 다 샴페인이 아니란 얘기다.
샴페인을 샴페인답게 만드는 데는 햇빛과 토양, 고도와 같은 천혜의 자연조건은 물론 인간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간섭이 있다. 인간이 빚는 술 중 가장 까다롭고 가장 기술적인 결과물이 샴페인인 셈이다.
새하얀 백악토가 솟아오른 샹파뉴 지역에 고대 로마인은 백색 도료로 건물을 지었다. 주민들은 수직 갱도를 확장해 미로처럼 이어진 땅굴을 만들었는데, 훗날 이 땅굴은 샴페인의 2차 발효에 완벽한 저장소 ‘크레예르’(백악갱)가 됐다. 구멍이 숭숭 뚫린 이 지역 토양은 포도나무의 지하수 저장고 역할을 톡톡히 하며 수세기에 걸친 프랑스인의 자부심, 그들의 유산을 지탱하고 있다.
현존하는 샴페인 하우스 중 가장 오래된 메종 루이나르가 300주년을 맞아 공개한 ‘파빌리온 니콜라 루이나르(Ruinart)’, 18세기 마리 앙투아네트부터 21세기 셀럽들까지 열광하는 ‘파이퍼 하이직 레어 샴페인’의 심장을 두 명의 아르떼 칼럼니스트가 다녀왔다. 샴페인 하우스가 수세기에 걸쳐 쌓아놓은 역사를 안다면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축배에 수만 개의 별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佛 최초 샴페인 하우스 '파빌리온 니콜라 루이나르'
파리에서 고속열차 테제베를 타고 북동쪽으로 약 50분을 달려 프랑스 샴페인의 수도인 랭스에 도착한다. 랭스는 한때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열린 역사적 소도시다. 순백색의 거대한 자연유산 백악(白堊)을 품고 있는 이 도시의 또 다른 상징은 샴페인 하우스들. 그중에서도 프랑스 최초의 샴페인 하우스 루이나르가 있다. 3년간의 긴 공사 끝에 지난 10월 새롭게 탄생한 ‘크레예르 4번지’ 루이나르의 역사적 공간 속으로 들어가봤다.
백악과 석회암, 채석장 동굴에서 숙성한 샴페인
루이나르 가문은 1729년대 랭스 고지대의 2만9000㎡ 규모 땅을 인수했다. 니콜라 루이나르는 그 부지 아래 백악과 석회암으로 된 동굴을 발견하고 ‘메종 루이나르’를 세웠다. 이 땅은 원래 13세기 중세 시대부터 도시의 성벽을 쌓는 데 동원된 백악과 석회암 채석장이었는데, 지하 공간은 빛과 열을 모두 차단해 샴페인을 숙성하는 데 최적의 환경이었다. 3개 층, 깊이 최대 35m에 달하는 채석장을 20년간 보강해 냉각 셀러로 만들면서 크레예르 4번지는 루이나르 샴페인의 심장이 됐다.
올해 300주년을 맞이한 메종 루이나르는 19세기 지은 본관 앞에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파빌리온 니콜라 루이나르’를 새로 지었다. 곳곳엔 예술품으로 가득한 정원을 조성했다. 건물은 돌과 유리로 구성된 초현대식이다. 건물 정면의 대형 유리 벽은 샴페인의 거품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처럼 아래는 투명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불투명해진다.
이 건물의 유리 벽은 실크스크린으로 처리돼 태양 광선을 필터링하는 단열재 역할을 한다.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기 위해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자재, 생물자원 원자재를 사용했다고. 또 지열과 태양광 패널 에너지로 80%의 에너지 자율성을 갖춘 혁신과 환경 보호 콘셉트를 잘 조합한 건축물이다.
파빌리온 니콜라 루이나르는 전통과 현대를 연결해온 일본 건축가 소 후지모토가 설계했고, 럭셔리 호텔의 부티크를 디자인해온 그웨나엘 니콜라가 실내 공간을 디자인했다. 정원의 조경은 크리스토프 고트랑이 맡았다.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조각공원
메종 루이나르에 도착하면 채석장길이라는 뜻의 ‘쉬망 데 크레예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석회암석 골목길로 음악과 함께 미스터리한 미로를 따라 메종 루이나르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방문자들은 자연과 예술작품이 융합된 정원에서 메종 루이나르 샴페인의 역사와 예술을 자연스럽게 체험한다.
친환경 조각 공원에서는 국적과 연령, 성별이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6명의 작가와 함께 ‘자연과의 대화’ 전시를 열고 있다.
주요 작품을 소개하자면 첫 번째로 에바 조스팽의 ‘카프리치오’. 정원 속의 작품은 마치 유적지의 흔적 혹은 로코코 장식과 낭만주의 장식을 떠올리게 한다. 티스 비어스테커의 ‘실레미아’는 센서를 통해 나무 수액의 흐름을 측정하고 실시간으로 수집된 나무의 건강 정보를 시각적인 신호로 작품을 통해 전달해 준다.
파스칼 마르틴 타유의 ‘디어컨트롤’은 사슴뿔을 연상시키는 거목의 가지에 샴페인이 담긴 것 같은 원색의 유리 열매들을 포도처럼 매달았다. 닐스 우도의 ‘돌’은 거대한 동굴에 갇힌 상징적으로 취약하고 매끄러운 대리석 알로 거친 암석 석회암과 큰 대조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렐리아 데모아지의 ‘우리 사이’는 단풍나무 두 개를 마치 나무줄기를 엮어 하나로 묶은 것처럼 인간이 자연에 의존하는 공생과 협력을 상징하는 연결고리로 표현했다.
크리스토프 고트랑은 “정원이 최대한 자연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려고 정원의 산책로와 땅 사이에 의도적으로 공간을 만들어 그 공간에 곤충 생태계가 자리 잡도록 유도했다”고 했다.
메종 루이나르는 창립 이후 열정적으로 예술을 지원해왔다. 아르누보 대표 화가 알퐁스 무하도 1896년 루이나르의 의뢰를 받아 최초로 샴페인 홍보 포스터를 디자인한 바 있다. 지금 크레예르 4번지에 30명이 넘는 작가의 작품 50여 점이 설치돼 있는데, 2018년부터 진행한 아트 프로젝트 ‘카르트 블랑슈’의 결과들을 만날 수 있다.
프레데릭 뒤포 메종 루이나르 대표는 “루이나르의 새 공간은 메종 루이나르 정신과 300년 역사의 결정체”라며 “자연과 예술, 문화유산, 샴페인 양조 노하우가 공존하는 곳”이라고 했다.
왕실 전용 샴페인 하우스 '파이퍼 하이직'
지난가을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한 시간 반을 차로 달려 샹파뉴 지방의 랭스에 닿았다. 오직 샴페인의 본고장에서 18세기 말부터 ‘왕실의 샴페인’이라고 불린 ‘파이퍼 하이직’을 찾아간 여정이다. 황금빛 버블을 형상화한 금빛 철제 구조물이 유리 건물 전체를 더 빛나게 하고 있었다. 레어 샴페인은 세계적인 샴페인 하우스 파이퍼 하이직에서 생산하는 최상급 샴페인이다. 포도 작황이 좋은 해에 최고 등급 포도밭인 ‘그랑 크뤼’와 ‘프리미에르 크뤼’에서 생산된 포도만을 엄선해 빈티지를 붙여 고객에게 내놓는, 말 그대로 ‘귀하디귀한’ 샴페인이다. 아름다운 샴페인 병을 감싼 금빛 티아라가 그 시그니처다.
여왕의 DNA를 가진 최고 럭셔리 샴페인
독일 베스트팔렌 출신인 플로렌스 루이 하이직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 랭스로 이주해 1780년부터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785년 ‘여왕에게 어울리는 여왕을 위한 샴페인’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자신의 이름을 딴 샴페인 하우스를 세웠다.
1788년 그가 만든 첫 샴페인 ‘퀴베(Cuve)’가 당시 여왕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헌사됐고, 그 맛과 사랑에 빠진 여왕은 프랑스 왕실 연회마다 하이직의 샴페인 하우스를 사용했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샴페인’으로 소문이 나며 유럽 각국의 왕실로 퍼졌다.
1837년 앙리 기욤 파이퍼가 회사를 물려받으며 샴페인 하우스를 ‘파이퍼 하이직’으로 개명했고, 2011년 EPI그룹에 소속되면서 레어 샴페인을 포함해 파이퍼 하이직 하우스에 속한 모든 샴페인이 최고 샴페인 하우스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레어 샴페인의 시작은 파이퍼 하이직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러시아 황제의 주얼리를 담당했던 칼 파베르제가 다이아몬드와 금, 청금석으로 장식된 병을 제작해 ‘라 퀴베 뒤 센티네어(La Cuve du Centenaire)’를 내놓은 1885년으로 본다.
긴 세월에 걸쳐 레어 샴페인은 고급화, 한정수량, 그리고 셀럽과 함께하는 샴페인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칸 영화제 공식 스폰서로 참여한 것부터 1985년 보석 브랜드 반클리프&아펠과 협업해 희귀 빈티지를 내놓은 게 대표적이다. ‘1976년 레어 샴페인’의 병 및 용기를 금과 다이아몬드로 디자인했는데 이 샴페인은 총 3병 중 1병은 랭스 본사에, 1병은 컬렉터의 손에, 1병은 도둑맞았다. 레어 샴페인을 사랑하는 유명 인사는 세계적인 팝가수 카밀라 카베요, 두아 리파, 블랙핑크의 로제, BTS의 진 등이 있다.
최고 품종의 포도, 200기통의 마법
레어 샴페인의 저장고로 향했다. 입구부터 코를 찌르는 숙성된 포도향으로 찌푸려진 미간은 거대한 은빛 보일러 룸의 스케일에 압도돼 금세 펴졌다. 약 200기통이 넘는 양조 통에 수천L가 넘는 베이스 와인이 1차 발효를 거치고 있었다. 수확된 포도를 종류별로 구분해 엄청난 크기의 사일로에서 착즙하고 이를 발효시켜 샴페인의 바탕이 되는 베이스 와인을 만든다. 파이퍼 하이직 계열의 샴페인은 레어 샴페인을 포함해 모두 유산 발효를 시키는데, 포도의 산도를 부드럽게 해준다.
발효 과정을 거쳐 병입된 와인은 또 한 번의 숙성 과정을 거쳐 샴페인으로 변신한다. 포도는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등 세 가지를 사용하고 모두 손으로 수확한다. 연도가 표기되지 않은 논빈티지 샴페인의 경우 최소 15개월, 연도가 표시된 빈티지 샴페인은 최소 3년을 숙성시키는 조건이라고.
파이퍼 하이직 샴페인은 부드러운 향기를 위해서 3년 이상 숙성하는데, 레어 샴페인은 최소 8~10년의 숙성 과정을 거친다. 스산한 동굴 깊숙이 들어가자 그 속엔 엄청난 양의 와인이 샴페인으로 태어나길 기다리며 긴 잠을 자고 있었다. 구역마다 숫자가 적혀 있어 생산 연도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포도의 품종, 샴페인 제조법, 레시피 등이 숨겨진 코드 넘버입니다. 이 숫자의 숨겨진 비밀은 오직 샴페인 메이커만 알아요.”
전설의 레지스 카뮈 ‘셀러’와 포도밭
파이퍼 하이직 샴페인 동굴을 지나면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샴페인 메이커, 레지스 카뮈의 프라이빗 셀러를 만날 수 있다. 카뮈는 천재적인 후각과 미각으로 샴페인의 품격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 세계적인 권위의 ‘인터내셔널 와인 챌린지 대회’에서 무려 여덟 번이나 ‘올해의 샴페인 와인 메이커 상’을 받은 업계의 전설이다. 그의 은밀한 샴페인 컬렉션엔 빈티지 1976, 1979, 1988 등을 포함해 그가 공을 들여 만든 ‘레어 샴페인 2002’도 보였다.
파이퍼 하이직의 본질을 더 알고 싶어 아이 샹파뉴에 있는 파이퍼 하이직 소유의 포도 농장으로 향했다. 15분 정도 달렸을까. 드넓게 펼쳐진 포도밭이 초록 윤슬로 물들어 있었다. 피노 누아의 성지답게 최상위 등급(그랑 크뤼)의 포도나무는 수확이 막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 있는 생명력으로 초록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수확한 포도로 ‘레어 샴페인’과 ‘레어 샴페인 로제’를 만든다.
김보라 기자/랭스=정연아 아르떼 칼럼니스트·패션&라이프 스타일 컨설턴트/샹파뉴=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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