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11년 만에 전원합의체를 통해 스스로 제시한 통상임금 기준을 뒤바꾼 판결을 19일 내놓으면서 산업계는 당분간 큰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동안 대법원 기준에 근거해 통상임금을 산정하고 연장·야간·연차수당 등 각종 수당을 지급해 온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급증하고 추가 임금소송이 속출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경영계 전체적으로 연 7조원 이상 인건비가 불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대법원은 2013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당시까지 명확한 기준이 없어 현장에서 혼란을 유발하던 통상임금 판단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정기성 일률성 고정성이 그것이다. 이 중 고정성은 ‘근로할 당시 지급 여부가 확정돼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지급하는 상여금은 고정성이 없어 통상임금이 아니다. 재직이란 조건을 갖춰야 하므로 근로 당시 지급 여부가 확정돼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고정성은 통상임금의 개념을 축소해 연장·야간·휴일근로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하게 해 근로기준법의 정책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고정성을 삭제했다. 대법원은 “근로자가 소정 근로를 제공하면 그에 부과된 조건이나 성취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통상임금”이라며 “(앞으로) 통상임금은 소정 근로의 대가로서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하도록 정한 임금”이라고 판시했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재직 조건이 있어도 고정성이 있다고 본 수준을 넘어 아예 고정성 요건을 삭제한 것”이라며 “예상을 뛰어넘은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다른 노동 전문 변호사는 “대법원이 자신들이 과거 제시한 요건을 신뢰하고 따른 기업들이 편법을 썼다는 식으로 되레 매도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로 상여금 대부분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면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은 천문학적으로 늘 전망이다. 국내 대기업 관계자는 “그룹 계열사 모두 정기상여금에 재직 조건을 걸어둔 상태”라며 “그룹 전체적으로 인건비가 1000억원까지 증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중견 제조업체 관계자도 “400억원 정도 추가 인건비 지급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번 판결 전 보고서를 통해 재직 조건만 적용되지 않아도 추가 지출되는 인건비를 연간 약 6조7888억원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이 재직 조건을 넘어 고정성 요건 자체를 삭제해 인건비는 훨씬 더 늘어날 전망이다. 다만 대법원은 이날 “법적 안정성과 신뢰 보호를 위해 새로운 법리는 이 판결 선고 이후 통상임금 산정부터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과거 통상임금을 다시 계산해서 추가로 지급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로 인한 혜택이 대기업 근로자에게 집중되면서 노동시장 이중 구조가 한층 심화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정기상여금 자체가 대기업에 주로 있고 지급 규모도 대기업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경총은 이번 판결로 증가하는 임금총액 전망액 중 47.7%에 해당하는 연간 3조2391억원이 전체 임금근로자의 5.1% 수준인 300인 이상 대기업 근로자에게 집중될 것으로 분석했다. 1인당 임금은 300인 이상 대기업 근로자가 연 361만6000원 증가하지만 29인 이하 사업장은 연 20만8000원 늘 것으로 예상했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대내외 경영 여건이 불확실한 가운데 이번 판결로 기업 인건비 부담이 커지면서 우리 경제에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강 본부장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연공서열 중심의 우리나라 임금체계를 직무급으로 바꾸는 근본적인 개선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곽용희/김진원/박상용 기자 kyh@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