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레스타의 영롱한 소리에 맞춰 클라라 역의 발레리나 이유림(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27)이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다른 무용수보다 보폭이 큰 덕분에 이어지는 동작이 더 아름답고 당당해 보였다. 매년 선보인 ‘호두까기 인형’이 새롭게 다가온 데는 이유림의 영향이 컸다.
수없이 이뤄낸 디테일의 변화가 공연 전체에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호두까기 왕자 역의 임선우(드미 솔리스트·25)도 부상을 딛고 훨훨 날았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1세대 빌리로 이름을 알렸던 소년은 어느새 관객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발레리노로 성장한 모습이었다.
호두까기 인형은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작곡하고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마스터였던 마리우스 프티파가 안무와 대본을 담당했으며 프티파의 건강이 악화된 뒤 제2 발레마스터였던 레프 이바노프가 안무를 완성한 작품이다. 초연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오늘날 매년 연말이면 세계에서 공연되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그래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발레 공연을 많이 접한 사람이라면 호두까기 인형으로 감동을 크게 받기란 쉽지 않다. 매년 똑같은 음악과 똑같은 춤, 드라마 요소가 적은 플롯 때문인지 저평가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선입견과 달리, 지난 2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유니버설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은 이유림과 임선우라는 발레단 기대주들의 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리였다. 예전부터 두 사람은 춤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파트너로 서는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서울 무대에서 처음 호흡을 맞춘 날, 마침 눈이 내렸다. 무대 위 두 사람은 동화 속 인물들처럼 팔랑거렸다. 1막 후반부 눈송이들 사이에서, 2막 꽃잎들 사이에서 ‘나부끼며’ 춤을 췄다. 팔과 다리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선, 가볍고 높은 점프는 호른 등 금관악기의 묵직한 소리와 대조되며 객석의 감정을 더욱 고조했다.
호두까기 왕자로 분한 임선우는 본인이 10대 시절 연기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빌리처럼 무대를 누볐다. 이번 무대에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백조의 호수’에 출연해 점프하던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이 고스란히 겹쳤다.
유니버설발레단은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 바실리 바이노넨 버전(마린스키 극장 계승)으로 공연을 올렸다. 줄거리와 상관없이 볼거리로 삽입되는 2막 디베르티스망에서도 허투루 지나가는 장면이 없다. 스페인춤이나 아라비아춤, 중국춤의 곡들은 음악을 리드하는 악기가 달라서 춤의 분위기가 바뀌는데 바이노넨 버전 안무는 그 차이를 더욱 극명히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이날 주역의 활약도 컸지만 군무의 역할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하게 만들었다. 흩날리는 눈송이를 표현한 1막의 ‘눈꽃송이춤’과 핑크빛 꽃잎을 연상케 하는 2막 ‘로즈왈츠’는 칼군무와 화려한 무대 연출이 어우러진 백미였다. 특히 로즈왈츠 군무 속 발레리노 가운데, 다른 공연날의 호두까기 왕자(이현준·콘스탄틴 노보셀로프)를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들은 군무를 리드하며 베테랑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어쩜 저렇게 쉽게 춤을 추지?” 커튼콜에서 연주되는 크리스마스 캐럴과 함께 박수를 치던 한 관객의 말이 들렸다. 무용수들의 춤이 쉽게 보일수록 무용수들은 사력을 다해 춤추고 있다는 사실, 발레는 알고 보면 실력 차이가 분명히 보이는 냉정한 예술이라는 걸 일깨워준 한마디였다. 공연은 30일까지 이어진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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