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두 갈래 길

입력 2024-12-22 17:33   수정 2024-12-23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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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학회 참석차 영국 런던에 갔다. 히스로공항의 입국심사장에 도착하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영국과 몇몇 나라 사람들을 위한 길 그리고 그 외 국가 국민을 위한 길이었다. 영국과 함께하는 몇몇 나라를 위한 길에는 유니언잭 옆에 태극기가 표시돼 있었다. 나는 한적한 길을 걸어서 무인 인식기가 설치된 심사대에 여권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손쉽게 입국했다. 나오면서 다른 길 쪽을 보니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심사관들이 일일이 그들의 입국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국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뿌듯한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학회 참가 전에 시간을 내 세계적인 현대미술 전시관 테이트 모던에 갔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어마어마한 규모의 설치미술 작품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명한 한국 미술가 이미래 작가의 ‘열린 상처(Open Wound)’라는 작품이었다. 태반을 형상화한 수십 개의 물체를 쇠사슬로 매달아 놓은 이 작품은 한국 사회와 역사를 상징하는 것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와 고민을 훌륭하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세계 현대미술의 심장에 한국인 작가가 이런 멋진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과 아울러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현대자동차가 이 전시의 후원사라는 점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학회 기간 중이던 토요일 아침 일어나서 TV를 켜니 BBC 뉴스에서 한국시간으로 그날 오후 3시에 국회에서 진행 중인 대통령 탄핵에 대한 두 번째 투표를 생중계하고 있었다. 아울러 마침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시리아의 정권 교체 소식도 자세하게 보도했다. 의회에서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한국의 정치적 과정과 다르게 50여 년에 걸친 독재 정권의 종식을 거리에서 환호하는 시리아인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그날뿐 아니라 학회 기간 내내 나는 계엄 사태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동료 학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느라 많은 시간을 써야 했다. 하지만 모든 대화는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사회의 자기 회복 능력을 전제한 것이었고, 누구도 한국이 정치적 붕괴에 직면한 것처럼 심각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내 머릿속에는 히스로공항 입국심사대에서의 경험이 우리 사회가 맞이하고 있는 정치 상황과 겹쳐서 종종 떠오른다. 우리 사회는 지금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다. 한쪽의 길은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성취를 기반으로 계속 발전을 추구하는 경로다. 가난을 극복하고 선진국 수준의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동시에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달성한 결과, 국민이 다양한 영역에서 자기 능력을 마음껏 발휘함으로써 문화 영역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으며 세계 어디를 가나 대접받는 삶을 누리는 길이다. 이 길을 계속 밟아나간다면 우리는 히스로공항뿐 아니라 많은 나라 공항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쉽게 누릴 수 없는 편의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쪽은 퇴보로 가는 길이다.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그로 인해 사회 경제 전반의 활력이 쇠퇴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우리는 시리아 국민처럼 혹은 과거의 우리처럼 다시 민주화를 염원하며 투쟁하는 지난한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는 창의성이 제대로 발현될 수 없을 것이기에, 경제는 후퇴하고 한류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지금의 위치에 도달하기까지는 오랜 기간 힘든 여정을 거쳤지만 최근 경제 상황은 이런 성취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에서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함과 아쉬움을 노래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두 갈래 길은 다르다. 우리 사회가 더욱 발전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길을 갈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도 경제 발전은 가능하지만, 민주주의가 아닌 선진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앞에는 가야 할 길 그리고 절대 가서는 안 될 길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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