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도량발호(跳梁跋扈)'를 선정했다고 한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날뛴다는 뜻으로, 현재의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는 온라인 콘텐츠 과소비로 인해 정신적·지적 상태가 악화되는 현상을 나타내는 'brain rot(뇌 썩음)'을, 미국의 메리엄웨스터 출판사는 'Polararization(양극화)'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고 한다. 일본은 권위적인 중년남성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인기 드라마 ‘부적절한 것도 정도가 있어’(不適切にもほどがある·후테키세쓰니모호도가아루)의 줄임말인 후테호도를, 중국은 출근만 하면 급피곤해지는 직장인을 비꼬는 반웨이(班味)를 선정했다고 한다.
2024년 노동판례는 어떨까. 올해 굵직한 노동판결이 여럿 선고됐고, 법적으로 의미가 크고 실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다만 이슈를 정리한 판결과 동시에 혼돈을 야기한 판결이 병존한다. ‘정리와 혼돈’으로 정리되는 주요 노동판례를 몇 가지 정리해본다.
#정리1
○근로자파견관계에서 실효의 원칙 적용을 긍정한 판결
대법원은 구 파견법상 고용간주 규정이 적용되는 근로자파견관계에서, 협력업체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퇴사하여 사업장을 떠난지 11년이 지나 원청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및 정규직과의 임금차액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하여 실효의 원칙을 적용하여 권리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장기간의 권리 불행사가 있었고 소송 상대방이 된 원청으로서도 더 이상 권리행사를 하지 않을 것으로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대법원 2024. 11. 20. 선고 2024다269143 판결).
실효의 원칙은 민법 제2조 신의성실의 원칙에서 파생된 법리로, 대법원은 그 동안 고용관계의 존부를 둘러싼 분쟁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왔으나, 근로자파견관계 분쟁에서는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러다가 이번 판결에서 구 파견법상 고용의무가 적용되는 경우 10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되는 것과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실효의 원칙을 적용하여 장기간의 권리불행사에 대하여 제약을 가하였다. 사업장을 떠난 지 10년이 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 권리주장을 하는 것은 법적안정성 측면이나 일반인의 법감정 측면에서도 허용되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이번 판결은 분쟁의 빈발을 막는 데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용의무에 적용되는 소멸시효 기간 10년이 실효의 원칙에도 일응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리2
○근로기준법 적용단위 및 외국계 기업의 상시 근로자수 판단에 관한 판결
상시 근로자수가 5명 이상인지는 근로기준법의 전면 적용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인데, 외국법인의 자회사인 국내 법인 또는 국내 영업소가 있는 경우 외국법인의 근로자수를 합산하여야 하는지 여부가 종종 문제가 되어 왔다.
이와 관련,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의 적용 단위가 되는 사업(장)은 경영상의 일체를 이루면서 유기적으로 운영되는 경제적, 사회적 활동단위를 의미하고, 법인격의 분리 여부가 독립적인 사업(장)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우선적인 기준이 되므로 법인격이 다른 조직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하나의 사업(장)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운 후 예외적으로 질적으로 동일한 경제적, 사회적 활동단위로 볼 수 있을 정도의 경영상의 일체성과 유기적 관련성이 인정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이들을 하나의 사업(장)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함으로써(대법원 2024. 10. 25. 선고 2023두57876 판결), 이 부분 문제를 정리하였다.
#혼돈1
○근로자파견관계 인정 시 적용되는 근로조건에 관한 법원의 재량을 인정한 판결
파견법에 따르면 파견근로자가 사용사업주의 근로자로 인정될 때 근로조건에 관하여 △동종 또는 유사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 근로자가 있는 경우 그 정규직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적용하고 △동종 또는 유사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 근로자가 없는 경우 기존 근로조건을 하회하지 않도록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근로자파견관계는 인정되지만, 동종 또는 유사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 근로자가 없는 경우의 근로조건을 정하는 것이 문제된 사건에서 대법원은 기존 근로조건을 하회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용사업주와 파견근로자가 자치적으로 근로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히면서, 만약 자치적인 근로조건을 형성하지 못한 경우 법원은 개별적인 사안에서 근로의 내용과 가치, 사용사업주의 근로조건 체계(고용형태나 직군에 따른 임금체계 등), 파견법의 입법 목적, 공평의 관념, 사용사업주가 직접 고용한 다른 파견근로자가 있다면 그 근로자에게 적용한 근로조건의 내용 등을 종합하여 사용사업주와 파견근로자가 합리적으로 정하였을 근로조건을 적용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법원이 보충적으로 파견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설정할 수 있다는 취지인데, 이는 개별 사건마다 모두 달라질 수 있고, 설정 가능한 범위 또한 매우 넓어서 향후 근로조건 설정을 둘러싼 분쟁이 늘어나고 그 양상 또한 매우 복잡해질 우려가 있다.
#혼돈2
○타다 드라이버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판결
대법원은 근로자성 여부가 논란이 되어 온 타다 드라이버에 대하여 직접 계약관계가 없는 쏘카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면서 쏘카의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대법원 2024. 7. 25. 선고 2024두32973 판결). 최근 확대되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매개로 한 관계인데다 직접 계약관계가 없는 당사자 사이에 근로계약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지 관심을 모은 사건이었는데, 대법원은 기존의 근로자성 판단기준 외에 플랫폼 특유의 사업 특성을 적정하게 고려하여야 한다는 법리를 처음 제시하면서 쏘카가 타다 드라이버의 노무제공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였다고 판단하였다.
플래폼 사업에서는 다양한 참여자가 존재하고, 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계약관계,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궁극적으로는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어 근로를 제공한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다소 불명확한 ‘주도권’이라는 개념으로 사용자 여부를 판단하게 되면서 플랫폼 사업에서 노동법 적용 여부를 놓고 상당한 분쟁이 예상된다.
#정리인듯 혼돈인듯
○통상임금 요건인 ‘고정성’ 폐지 판결
대법원은 2024. 12. 19. 전원합의체 판결(대법원 2020다247190, 2023다302838)을 통하여 기존에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어 온 통상임금의 ‘고정성’ 요건을 폐지하였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임금항목은 지급일 재직이나 일정 일수 근무를 지급조건으로 둔 항목들로 기존 법리에 따르면 통상임금이 아니었으나 이제 모두 통상임금이 되었다. 고정성을 아예 통상임금 요건에서 제외함으로써 논란을 일거에 정리하고 통상임금과 평균임금도 거의 차이가 없어 간단해진 의미가 있으나, 대법원이 2013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정립하였고, 이후 많은 기업들이 그에 따라 노사합의 등을 통하여 임금체계를 만들어 온 점에서 향후 혼돈은 불가피하다.
물론 대법원은 판례 법리의 소급효를 제한함으로써 법적 불안정성을 최소화하려고 하였으나, 임금체계의 변화가 불가피한 기업들이 많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혼란이 예상된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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