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마무리와 시작 자리에서 어찌 와인 한잔이 빠질 수 있으랴. 그런데 모임을 진행하다 보면 한결같은 아우성이 있다. 바로 가격 관련해서다. 웬만한 프리미엄 와인 한 병이 수십만원에 달하니 그럴 만하다. 합리적 소비 방안은 없을까.
그 답을 우리나라 반대편 남미에서 찾는다. 안데스 향기 가득한 칠레 와인을 마시다 보면 세 번 놀란다. 그것은 바로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과 우수한 품질, 그리고 새로운 경험이다.
칠레 와인의 명가 에라주리즈는 1983년 에두아르도 채드윅 현 회장이 가업을 승계하면서 고급화를 선언했다. 1999년 비네도 채드윅을 시작으로 라 쿰브레, 카이와 같은 명품 와인을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그러나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채드윅 회장은 다양한 방안을 고민하던 중 2004년부터 ‘베를린 테이스팅’ 행사를 진행한 것. 보르도 5대 와인은 물론 이탈리아 슈퍼 토스칸과도 품질 경쟁을 벌였다.
행사는 2013년까지 아메리카, 아시아 등 세계 18개국에서 총 22회나 진행됐다. 같은 기간 돈 막시미아노는 5회, 카이는 1회 1등을 차지하면서 최고급 와인으로 인정받았다.
최근 서울을 찾은 에라주리즈 아시아 디렉터 하이메 리베라 구즈만 이사는 “150여 년 전통의 에라주리즈는 안데스산맥 최고봉 아콩카구아 밸리에 최초로 포도밭을 조성했다”고 설명하고 “우리 포도 나무는 빙하수 녹은 물과 태평양, 북극의 청정 기후 영향을 받고 자라 자연스럽게 유기농 와인으로 탄생한다”고 말했다.
이날 테이스팅 행사에서 선보인 와인은 모두 다섯 종류. 그중 3가지를 소개한다. 가장 먼저 나온 아콩카구아 코스타 샤르도네(2023)의 짙은 노랑 컬러는 침샘을 자극했다.
첫 모금에서 산뜻하고 부드러운 산도를 단박에 잡았다. 프랑스 부르고뉴나 미국 캘리포니아의 샤르도네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다. 함께 나온 요리 가리비 세비체는 물론 방어 타르트와도 절묘한 맛의 조화를 이뤘다. 옆자리 참석자는 연방 감탄사를 터뜨렸다.
다음은 카르메네르 품종의 정수를 보여주는 카이(2021)로 잔을 채웠다. 이 대목에서 구즈만 이사는 긴 설명을 이어갔다. 메인 품종인 카르메네르의 기구한 운명 때문이다.
행사 진행을 맡은 구즈만 이사는 “카르메네르의 원래 고향은 프랑스 보르도 메도크 지역이다. 1800년대 중반 필록세라 곤충 창궐로 자취를 감췄다가 1994년 다시 세상에 나왔다”고 말했다.
칠레에서 메를로로 재배되던 품종이 알고보니 카르메네르라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프랑스 유명 품종학자는 필록세라 창궐 전에 칠레로 전해진 카르메네르 원품종임을 확인했다.
실제 메를로와 카르메네르는 잎 모양, 두꺼운 껍질 등이 비슷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가을철 단풍 유무인데 카르메네르는 잎 가장자리가 붉은 빛으로 변한다. 카이 와인 라벨 상단에는 붉게 물든 단풍잎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와인 맛은 어떨까. 첫 모금에서 말린 고추와 동물 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검은 열매, 자두, 스파이스 풍미와 함께 둥글고 부드러운 타닌이 잡혔다. 카이는 카르메네르 85% 외에도 시라 11%, 말베크 4%를 섞어 만들었다. 특히 말베크는 장미와 제비꽃 향기를 유지하기 위해 블렌딩했다.
에라주리즈의 주인공 와인 돈 막시미아노(2016)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첫눈에 짙은 자주색과 짙은 향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산뜻한 산도와 부드러운 맛에 깜짝 놀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한 후추와 붉은 과일 향은 남미 분위기를 그대로 표현했다. 긴 여운은 물론 복합적이면서도 편안한 균형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칠레 와인 돈 막시미아노의 명품 대열 합류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김동식 와인칼럼니스트
juju433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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