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달 한국수력원자력은 미국 핵연료 기업 센트러스에너지에서 2031년부터 저농축 우라늄을 장기 공급받는 내용을 골자로 한 주요 조건 합의서를 체결했다. 현재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4개국으로 국한해 들여오는 농축 우라늄 수입원을 미국으로 다변화하려는 시도다.
원자력 발전 연료인 농축 우라늄이 신냉전 시대의 새로운 ‘뇌관’으로 부상하면서 정부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2028년부터 러시아산 농축 우라늄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예고하자 러시아가 수출 제한에 나서는 등 핵연료 공급망을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은 농축 우라늄 자체 생산이 불가능하고, 수입의 40%를 러시아·중국에 의존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정부도 러시아·중국 의존도 줄이기에 나섰다. 수입처를 우방국 중심으로 다변화하고 러시아와 중국의 가격 공세에 취약한 현행 최저가 입찰 제도를 개편한다는 방침이다.
산업부가 이 같은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원전이 인공지능(AI) 기술 등으로 폭증하는 전력 수요의 대안으로 떠오른 가운데 1970년 발효된 핵확산방지조약(NPT)에 따라 공급이 제한된 농축 우라늄이 상대 진영을 압박하는 전략 무기화하고 있어서다.
핵연료의 ‘원석’인 천연 우라늄은 고갈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부하다. 생산국은 20여 개국에 달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천연 우라늄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5%와 3%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농축 우라늄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소수의 열강만 생산할 수 있다. 농축 우라늄 시장은 러시아(로사톰) 44%, 영국(유렌코) 29%, 중국(CNNC) 14%, 프랑스(오라노) 12% 등 4개 기업이 생산량의 99%를 차지하는 과점 구조다.
국제 사회가 농축 우라늄 생산을 제한하는 것은 핵무기 연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우라늄은 천연 상태에서 0.711%인 ‘우라늄-235’ 농도를 농축을 통해 3% 이상으로 높여야 핵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 가동 중인 원전엔 농도 3~5%의 저농축 우라늄(LEU)이, 소형모듈원전(SMR) 등 차세대 원전엔 5~20%의 고순도 저농축 우라늄(HALEU)이 필요하다. 핵폭탄엔 농도를 90% 이상으로 높인 고농축 우라늄(HEU)이 쓰인다.
미국 조 바이든 정부는 농축 우라늄의 러시아,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핵연료 공급망을 재건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차세대 핵연료인 HALEU 공급망 구축에만 7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한수원과 공급 계약을 맺은 센트러스에너지의 농축 우라늄 생산이 시작되는 시점이 2028년이다. 미국이 러시아산 농축 우라늄 수입 중단을 예고한 시기다.
정부는 이런 우려를 최소화하기 위해 농축 우라늄 수입 계약 제도 개편을 검토하고 있다. 현행 최저가 입찰 제도에선 러시아 로사톰과 중국 CNNC가 우방국 기업인 유렌코(영국)와 오라노(프랑스)보다 조금이라도 싼 가격을 제시하면 한수원은 로사톰과 CNNC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원전업계 관계자는 “자국 내 다수의 우라늄 광산을 보유한 러시아와 중국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영국과 프랑스 기업보다 월등하게 높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미·중 패권전쟁이 격화할 가능성에 대비해 다양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인공지능(AI) 기술이 발전하고 이상 기후에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러·중 리스크가 현실화했을 때 한국이 충분한 양의 농축 우라늄을 적절한 가격에 확보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며 “안보 관점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최저가 입찰제 개편은 물론 미국 등과 협의해 한국도 독자적으로 농축 우라늄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놔야 한다”고 조언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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