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미국 미시간주 밴뷰런카운티 팰리세이드 원자력발전소 인근 소형모듈원전(SMR) 준비 현장. 땅에 43개의 구멍을 뚫어 지반 강도와 토양 성질을 분석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미국 고등학교 평균 면적(10만㎡) 정도의 좁은 땅이지만 SMR-300 두 기가 설치되면 데이터센터 두 개를 감당할 수준의 전력(640㎿)이 생산된다. 한국 미디어 중 처음으로 방문한 이 현장은 현대건설이 미국 원전업체 홀텍인터내셔널과 개발하는 세계 최초의 원전 클러스터다.
국내 건설사가 침체한 내수시장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에서 새 돌파구를 찾고 있다. 25일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해외건설 수주액은 지난해 동기보다 17.9% 증가한 326억9352만달러였다. 1965년 첫 해외 수주(태국 타파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이후 누적 수주액은 9965억달러로 ‘1조달러’ 돌파를 앞뒀다.
건설사들은 부진한 국내 주택시장의 대안으로 SMR과 친환경 프로젝트, 신도시 개발 등 해외시장 공략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현대건설, 삼성물산, DL이앤씨 등은 원자력발전소뿐 아니라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불리는 SMR 사업에 뛰어들어 ‘제2의 수주 잭팟’을 노리고 있다. 글로벌 SMR 시장 규모는 2040년 400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한국의 아파트 커뮤니티와 신도시 조성 노하우 같은 소프트파워까지 담은 K주택 수출에도 앞장서고 있다. 대우건설은 베트남에서 한국 주거문화를 결합한 ‘K신도시’를 선보이고 있다. 반도건설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부영은 캄보디아에서 ‘K주택 붐’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 건설사가 지난 60년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축적한 기술력과 발주처의 신뢰, 시공 노하우 등이 수주 원동력으로 꼽힌다. 단순 시공을 벗어나 최첨단 플랜트 등을 직접 설계하고 시공·운영까지 맡는 종합 디벨로퍼로 발돋움하고 있다. 정구혁 현대건설 북미법인장은 “오랜만에 원전 건설을 재개하는 미국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바라카 원전 건설 등 경험이 풍부한 한국 업체와의 협업을 선호한다”며 “세계 곳곳에 K건설을 원하는 발주처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삼성물산, 뉴스케일 등과 협력…루마니아·스웨덴서 SMR 사업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불리는 SMR 상용화가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 유럽 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 SMR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원전을 건설하고 안전하게 운영해온 한국 기업의 역량도 크게 주목받고 있다.
현대건설과 홀텍이 내년 초 착공하는 팰리세이드 SMR 현장은 세계 최초로 원전 재가동과 신규 SMR 설치를 병행하는 SMR 클러스터다. 안전 문제로 2년 전에 문을 닫은 팰리세이드 원전을 재가동해 기존 원전 인프라와 인력 풀, 환경영향평가 등을 SMR 설치에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홀텍이 적용하는 3.5세대 SMR은 물을 냉각재로 사용하지만 기존 원전처럼냉각수를 외부에서 계속 공급하지 않아도 되는 피동형 냉각 방식이다. 미국 에너지부는 이 프로젝트를 차세대 원자로 실증 프로그램 모델로 선정하고 약 7년간 1억5000만달러를 지원할 계획이다.
현장에서 만난 지역민들은 ‘원전의 심장이 다시 뛰는’ 일에 들뜬 분위기였다. 잭 모리스 마켓원(밴뷰런·캐스카운티경제개발청) 전무는 “팰리세이드 원전 재가동으로 지역경제에 연 3억달러 가치가 새로 창출될 것”이라며 “전력을 확보하면 데이터센터를 유치할 수 있는 만큼 최근 6개월 새 빅테크 투자 문의가 30여 건에 달했다”고 했다.
삼성물산은 미국 뉴스케일파워에 7000만달러를 투자한 뒤 기술 협력을 하고 있다. 지난 7월엔 미국 플루어, 뉴스케일, 사전트앤드룬디 등 글로벌 엔지니어링 기업 3곳과 공동으로 기본설계(FEED)에 착수하면서 루마니아 SMR 사업을 본궤도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스웨덴 민간 SMR 개발사인 칸풀넥스트와 스웨덴 SMR 사업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스웨덴 정부는 지난해 자국 원자력 로드맵을 공개하면서 2035년까지 최소 2500㎿ 규모의 원전 설비를 확충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DL이앤씨는 미국 SMR 개발사인 엑스에너지와 손잡고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작년 1월 2000만달러 규모의 전략적 투자를 했고 올해 엑스에너지가 SMR 대표 모델로 개발 중인 ‘Xe-100’을 적용한 SMR 플랜트 운영 및 유지 보수를 위한 기술을 공동으로 개발 중이다. DL이앤씨는 SMR 가동 때 발생하는 높은 열을 또 다른 친환경 에너지원인 수소, 암모니아 생산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SMR 사업과 접목한 친환경 에너지 밸류 체인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DL이앤씨는 SMR 플랜트 설계·조달·시공(EPC)과 함께 운영 및 보수 분야까지 SMR 모든 주기의 기술 경쟁력 확보를 기대하고 있다. 엑스에너지는 글로벌 화학기업 다우와 손잡고 공업지대 내 무탄소 전력과 고온의 공정열 공급을 위한 SMR 건설을 추진 중이다.
밴뷰런(미국)=이상은 특파원/심은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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