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미쉐린 레스토랑’만큼 ‘미쉐린 호텔’이라는 말이 더 친숙해질지 모르겠다. 레스토랑 평가 기관 미쉐린가이드가 호텔 평가에 나섰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을 등급에 따라 별 개수로 나눴다면, 호텔은 키(열쇠)의 개수로 분류한다. 레스토랑 평가와 마찬가지로 평가 위원·기준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고, ‘1키’를 받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런 점에서 15개의 호텔이 키를 따낸 오스트리아 빈은 주목할 만하다. 미쉐린가이드로부터 뛰어난 평가를 받은 빈의 호텔 두 곳을 다녀왔다.
1키 : 탁월한 경험을 제공하는 훌륭한 호텔
2키 : 매우 뛰어난 서비스와 품질을 갖춘 특별한 호텔
3키 : 독보적인 숙박 경험을 제공하는 세계 최고의 호텔
초콜릿으로 스파를 : 호텔 자허
자허토르테는 1832년 파티셰 프란츠 자허의 손에서 태어났다. 겨우 16세의 견습생이던 그는 한 공작의 주문으로 초콜릿, 살구잼, 휘핑크림을 조합해 새로운 스타일의 디저트를 발명했다. 쌉싸름함과 달콤함이 조화를 이루는 케이크는 단숨에 유럽을 사로잡았고, 빈을 ‘빵지순례’의 명소로 등극시켰다.
파티셰의 아들 에두아르트 자허는 1876년 가문의 이름을 딴 호텔을 열었다. 호텔은 오픈과 동시에 사교의 중심이 됐다. 대표적 단골손님은 ‘비운의 황태자’ 루돌프. 왕궁을 답답하게 여기던 그는 이곳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는데, 값을 치른 적은 한 번도 없다. 루돌프는 끝내 외상값(?)을 내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호텔은 뒤늦게 청구서를 내밀었다. 이에 오스트리아 황실은 현금 대신 은식기로 값을 치렀는데, 이 식기는 호텔 1층에 전시돼 있다.
전쟁과 운영난을 겪으며 호텔 소유주가 바뀌었지만, 빈 도심 한가운데에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전통은 그대로다. 이곳을 찾은 셀럽들은 셀 수 없는데, 오죽하면 호텔 1층을 ‘명예의 전당’으로 꾸몄을 정도다. 존 F 케네디, 엘리자베스 여왕과 찰스 3세, 앙겔라 메르켈 등 정치인부터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 뮤지션 저스틴 비버, 배우 에디 레드메인까지 익숙한 얼굴이 가득하다. 공통점은 모두 ‘내돈내산’ 고객이라는 것. ‘유명 인사 할인은 일절 없다’는 것이 호텔의 원칙이다.
호텔 자허는 2004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마쳤다. 이를 위해 개관 이후 처음으로 10주간 문을 닫았다. 럭셔리 호텔 디자이너 피에르 이브 로숑이 참여해 호텔을 한층 호화로운 공간으로 완성했다. 클래식한 디자인에 감각적인 미감을 자랑하는 객실은 마치 현대적인 궁전처럼 보인다. 객실은 1박당 750유로부터다. 성수기가 따로 없이 일 년 내내 인기가 높아 예약이 쉽지는 않다.
꼭 투숙하지 않아도 호텔 자허를 즐길 방법은 많다. 예를 들면 라운지&바에서 자허토르테를 즐기며 ‘명예의 전당’ 속 인물들을 구경하기. 자허에는 30년 이상 근무한 직원도 많은데, 이들과 대화하는 것도 재미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머리가 새하얗게 센 할아버지 웨이터가 호텔의 흥미로운 비화를 들려준다.
파티셰 자허의 유산을 온몸으로(?) 느끼는 방법도 있다. 자허 초콜릿 스파를 방문하는 것. 카카오 필링으로 몸을 매끈하게 한 다음 초콜릿 크림으로 촉촉하게 보습하면 하루종일 온몸에서 자허 초콜릿 향이 풍긴다. 오감으로 빈 역사를 탐방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인 곳은 분명하다.
‘빈 시크’가 있는 곳 : 호텔 모토
빈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는 호텔 모토가 제격이다. 1665년 세워진 건물은 40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고풍스러운 아치형의 대리석 문, 족히 3m는 되는 높은 층고가 그렇다. 호텔은 이 유산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해 ‘진짜 레트로’의 공간으로 완성했다.
호텔에 들어서려면 길게 드리워진 커튼을 젖혀야 한다. 로비는 사교계의 은밀한 살롱처럼 좁고 어둑하다. 로비를 최대한 환하고 넓게 설계하는 요즘 호텔과는 정반대다. 체크인 전 건네는 웰컴 칵테일, 샹들리에 조명이 은은하다 못해 침침하게 비추는 복도, 1950년대 스타일의 엘리베이터, 끼익 소리가 날 정도의 크고 무거운 객실 문은 연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점은 오스트리아 패션 디자이너 레나 호슈크가 디자인한 객실이다. 1950년대에서 받은 영감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그는 꽃과 새, 식물과 고전적인 패턴의 벽지로 독창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장인이 한땀 한땀 수놓은 레이스 장식의 스탠드, 오스트리아산 목재로 짜 넣은 맞춤 가구는 공간의 멋을 더한다. 이렇듯 정교하게 계산된 빈티지는 흑백 영화의 세트장 같기도, <소공녀>의 다락방 같기도 하다.
모토 호텔은 이를 ‘빈 시크’ 스타일이라고 정의한다. 심플하고 꾸밈없는 것이 ‘프렌치 시크’라면, 예술과 역사가 낭만적으로 어우러진 것이 빈 시크다.
칵테일 테이블은 ‘비에니즈’들의 낭만을 보여주는 요소다. 보드카, 진, 위스키에 크리스털 잔과 지거, 생과일까지 칵테일을 만들 수 있는 재료와 레시피 북을 구비해 뒀다. 정성스레 칵테일 한 잔을 만들어 마시는 의식은 객실을 진정한 ‘자기만의 방’으로 바꿔줄지 모른다.
이곳에서 머무른다면 조식을 꼭 포함할 것. 호텔 모토를 소유한 모기업 모토는 케이터링 업체다. 지금도 오스트리아 대통령실이나 구찌 등이 주최하는 굵직한 행사의 케이터링을 도맡고 있다. 호텔 레스토랑의 수준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식은 7층의 레스토랑 ‘셰 베르나르’에서 ‘알 라 카르트’(단품) 형식으로 제공한다. 에그 베네딕트, 프렌치 토스트 등 메뉴는 평범하지만 맛은 파인다이닝 수준이다. 빵은 호텔 1층 베이커리에서 직접 굽는데, 아침이면 온 복도에 빵 냄새가 가득하다.
빈=김은아 한국경제매거진 기자 una.kim@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