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은 요즘 정치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2024년 갑진년(甲辰年)을 '초유년(初有年)'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는 자조 섞인 농담이 나오곤 합니다. '사상 초유의 사태', '헌정사상 초유의 일' 같은 말들이 유독 정치 뉴스 제목에 자주 따라붙었기 때문인데요. 수없이 가슴이 철렁했던 올해의 마무리를 앞두고 정치권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톺아보겠습니다.
①정치인 흉기 피습
2024년 1월 2일, 부산을 찾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흉기에 습격당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67세 남성 김모씨.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벌어진 정치 테러 행위였습니다. 충격에 빠진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김씨 공격으로 내경정맥이 9㎜ 손상되는 상처를 입은 이 대표는 수술과 입원 치료를 받고 8일 만에 퇴원했습니다. 어쩌면 올해 극단으로 치달은 정치 양극화를 최초로 예고한 사건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재명 대표의 흉기 피습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월 25일, 이번에는 여당 인사인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서울 강남구의 한 건물에서 머리를 돌덩이로 15차례 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대한민국에 또 한 번 충격을 안겼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더욱더 경악스러웠는데요. 바로 15살 남자 중학생이었습니다. 이 학생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범행했다"면서 범행 당시 심신 상실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정치 양극화가 빚은 참상이라는 것을 금방 까먹은 걸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야는 두 사건을 놓고 또 충돌해 한숨을 자아냈습니다.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흉기 피습 사건 직후 경찰이 현장의 핏자국을 물청소한 것을 언급하면서 "배현진 의원이 돌멩이로 맞은 사건은 폴리스라인을 치고, 과학수사를 하고 난리 뽕짝을 쳤다"고 했습니다. 이에 배현진 의원은 "흉악한 살인범 조카 변호하고 형수님을 잔인하게 능욕하던 그 입 아닌가"라고 받아치면서 갈등은 해소되기는커녕 격화됐습니다.
②4·10 총선
올해 제22대 국회의원선거가 치러진 4월 10일을 빼놓고 2024년 정치사를 논할 수 없는데요. 사상 초유의 사태를 여럿 불러일으킨 '역대급 여소야대' 국면이 완성된 총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 등을 비롯한 범야권은 192석을 가져갔고,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108석에 그쳤습니다. 국정 운영 주도권은 고사하고, 탄핵·개헌 저지선도 불안하게 된 참패였습니다. 이는 곧 '사상 첫' 감액예산안 국회 본회의 통과, '사상 첫'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소추안 통과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총선 결과를 들여다보면 유의미한 대목도 더러 있었습니다. 먼저 조국혁신당이 야권에서의 민주당 독주를 일부 저지하면서 '12석 제3당'이라는 성적을 거둔 것이 있습니다. 또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이 2016년 제19대 총선 이후 최초로 단일화 없이 제3당 후보로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도 총선 국면의 핫이슈였습니다. 민주당 非이재명(비명)계가 총선을 앞두고 꾸린 새로운미래의 약진 여부도 관심사였으나, 1석을 얻는 데 그쳤고 이마저도 민주당 후보 공천 취소 사태로 얻은 어부지리여서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③사법부의 시간
올해에는 국회의사당과 여야 중앙당사가 위치한 여의도보다 서울중앙지법과 대법원이 있는 서초에서 더 큰 규모의 정치 집회가 열리는 장면이 포착됐습니다. 야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이자, 대형 팬덤을 거느린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서울중앙지법 심판대에 올랐고,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자녀 입시 비리' 등 혐의에 대한 상고심 선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재명 대표의 두 개 혐의 1심 선고는 각각 11월 15일(공직선거법 위반), 11월 25일(위증교사) 두 차례 이뤄졌습니다. 공직선거법 위반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한성진 부장판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위증교사 1심인 같은 법원 형사합의33부(김동현 부장판사)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두 사건 모두 항소심을 거쳐 상고심까지 진행될 전망인데요. 특히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서의 양형은 '의원직 상실형'에 해당돼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재명 대표와 함께 유력한 차기 주자로 거론되던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는 12월 12일, 대법원에서 '자녀 입시 비리' 혐의 등으로 하급심에서 선고받은 징역 2년형을 확정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처음 기소된 지 5년 만이자, 2심 선고 후 10개월 만에 나온 결론이었습니다. 7년간 피선거권을 잃게 돼 다음 대선 및 총선 출마도 불가능해진 조 전 대표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지지자들과 당원들에게 '옥중 편지'를 띄우며 재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두 야당 수장의 재판으로 정치권에는 '사법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와 '재판 지연'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먼저 사법의 정치화는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재판 결과가 나왔다는 이유로 사법부를 매도하는 행위를 일컫는데요. 일례로 민주당 내에서 의원직 상실형이 나온 공직선거법 1심 재판부에는 "미친 정권의 미친 판결"이라는 비난이 나온 반면, 무죄를 선고한 위증교사 1심 재판부에는 "재판부의 현명하고 용기 있는 판결에 경의를 표한다"는 상반된 반응이 나왔습니다.
기소 5년 만에 형이 확정된 조국 전 대표 사례로는 '재판 지연'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습니다.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은 소 제기 후 5~6개월 안에 1심 판결을 선고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의 재판은 1심 판결에만 3년 2개월이 걸린 겁니다. 그 결과 조국 전 대표는 정당을 만들어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 의원직도 6개월여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 격언이 이때 무수히 많은 재조명을 받았었죠.
④한동훈의 기회? 위기?
지난해 말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로 허덕이던 국민의힘의 구원투수 격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도 올해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총선 방향키를 잡은 그는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 '운동권 심판론' 등을 주창했지만, 결국 당은 총선에서 참패했습니다. 그리고 총선 바로 다음날인 4월 11일 비상대책위원장직에서 물러났죠.
여권에서 유일하게 '정치 팬덤'을 가진 그는 높은 인지도와 지지율을 무기 삼아 7월 28일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이어 62.8%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권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한 전 대표가 2027년으로 예정됐던 차기 대선까지 순항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컸습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親윤석열(친윤)계와 시종일관 충돌했고, 비상계엄 사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결정타를 맞고 12월 16일 당 대표직에서 쫓겨나게 됐습니다.
한 전 대표의 임기(147일)는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출범한 국민의힘 계열 정당 지도부 가운데 가장 짧았던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정계에 입문한 지 1년도 안 된 상황에서 2번의 사퇴를 경험한 한 전 대표는 탄핵 정국에서 한발짝 거리를 두다가, 때가 되면 대권 행보에 나설 것으로 예상됩니다. 법무부 장관 시절 특유의 화법 등으로 '한동훈 신드롬'까지 일으켰던 한 전 대표가 전화위복(轉禍爲福)에 성공할지 주목됩니다.
⑤12·3 비상계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초유의 사태이자, 전국민을 혼란에 빠트린 중대 사건으로 기록될 겁니다. 윤 대통령은 3일 밤 10시 28분쯤 용산 대통령실에서 긴급 대국민 담화를 열고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발령된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은 무시무시했습니다. 포고령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 활동은 금지된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전공의를 비롯한 파업중이거나 의료 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복귀해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고 했습니다.
오후 11시께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기 위해 의원들이 국회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경찰에 가로막힌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국회 담을 넘는 초유의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각 국회 내부에서는 총을 멘 계엄군이 국회로 진입했고, 보좌진 등과 격렬한 대치를 이어갔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도 이때 국회에 있었는데요. 국회 관계자로 추정되는 한 남성이 휴대폰을 붙잡고 "집 밖에 절대 나오지 마"라고 절박하게 외치는 장면을 보며 공포스럽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속속 국회로 모인 의원들은 익일인 4일 오전 1시께 국회 본회의에서 계엄 해제 요구안을 통과시켰고, 국회를 둘러싼 시민들은 "우리가 승리했다"며 환호했습니다. 이어 윤 대통령이 4일 오전 4시 27분께 용산 대통령실에서 다시 생중계를 통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가 있어 계엄 사무에 투입된 군을 철수시켰다"고 밝히면서 6시간 동안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비상계엄 사태가 일단락됐습니다.
⑥탄핵소추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로 대한민국은 8년 만에 다시 탄핵 정국에 휩싸였습니다. 민주당 등 야당은 4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농단 내란 수괴 윤석열을 탄핵하겠다"고 밝힌 뒤,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사흘 뒤인 12월 7일 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으나, 안철수·김예지·김상욱 의원을 제외한 국민의힘 의원들이 표결에 불참하면서 탄핵안은 의결 정족수 미달로 폐기됐습니다.
하지만 야당은 "반드시 이기겠다"면서 2차 탄핵안을 곧바로 발의했습니다. 2차 탄핵안 표결은 12월 14일, 표결 전까지 국민의힘 안철수, 김예지, 김상욱, 조경태, 김재섭 의원이 탄핵 찬성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통과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 결과 탄핵안은 총투표수 300표 중 가 204표, 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통과됐습니다. 이제 탄핵안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가 최종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으로 끝날 줄 알았던 탄핵소추안 표결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놓고 또 한 번 이뤄졌습니다. 야당은 한덕수 권한대행이 "대통령 고유 권한 행사를 자제하고자 여야 합의 전까지 헌법재판관 임명을 보류하겠다"고 밝히자마자 탄핵안을 발의해 27일 통과시켰습니다. '권한대행 탄핵'도 헌정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다가오는 2025년 을사년(乙巳年)에는 더 이상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고, 여야가 화합하는 모습을 보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요?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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