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우리 애도 그리겠다"…수백억짜리 그림에 숨겨진 비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4-12-28 11:55   수정 2024-12-2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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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림이냐? 내가 더 잘 그리겠다. 아니, 우리 애도 그리겠다. 이런 게 수백억 원이라니 기가 차서 콧물이 나온다.”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이 그린 이 작품, ‘구성 No. 3’가 5200만달러(약 735억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을 2년 전 기사로 썼을 때 댓글 창에는 이런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뭘 그렸는지도 모르겠고, 전달하려는 의미도 불분명하고, 그림 기술이라고 할 것도 없이 단순해 보이는데 대체 왜 비싸냐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댓글은 “너무 뻔하고 식상하지 않느냐”. 냉장고부터 공장 외벽까지, 우리 주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흔한 디자인인데 뭐가 대단하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의견은 오히려 몬드리안의 작품이 그만큼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처음 나올 땐 엄청난 혁신이었지만, 너무 빨리 ‘당연한 존재’로 일상에 녹아들어서 그 새로움을 잊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존재가 그렇고, 키보드나 숫자 패드 대신 화면으로 입력하는 터치스크린이 그렇고, 언제 어디서든 온라인으로 동영상을 즐길 수 있는 유튜브가 그렇습니다. 몬드리안의 그림도 마찬가지. 그가 붓을 들기 전까지 세상에 이런 그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몬드리안의 작품 이후 이 같은 ‘단순함과 순수함의 미학’은 사회 전반의 디자인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영원히 바꿔 놓았습니다.

하지만 몬드리안이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던 건 아닙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순수함은 뼈를 깎는 시행착오들을 거쳐 불필요한 것들을 걸러낸 결과물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몬드리안은 많은 걸 포기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라는 원석을 깎아내 순수한 예술이라는 보석을 만들어낸, 몬드리안의 삶과 작품 이야기.
광신도 아버지, 미술의 길을 열다
종교에 몸을 내던진 광신도. 몬드리안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지방 도시의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는 네덜란드 개신교의 한 종파를 열렬히 믿었습니다. 자기 삶은 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천국에 가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도 검소하다 못해 가난한 삶을 요구하고, 자기 자식에게 좋은 옷을 입히는 것보다 이웃에게 종교를 전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몬드리안은 1872년 이런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은 가난했습니다. 몬드리안에게 사랑과 안정을 주던 어머니는 자주 아팠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마치면 이런 어머니를 간호하거나 집안일을 돕기는커녕 종교 활동에만 열중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환경이 몬드리안을 작가로 만들었습니다.

몬드리안에게 그림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건 아버지였습니다. 종교 활동을 위한 그림을 그릴 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몬드리안이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굳은 신념을 갖게 된 것도 집안 분위기의 영향이 컸습니다. 목적을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하는 자세, ‘인간은 어떤 위대한 사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은 아버지의 사상을 꼭 빼닮았으니까요. 다만 아버지는 신에게 신앙을 바쳤고, 몬드리안은 예술에 삶을 바치기로 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몬드리안이 미술 재능을 갈고닦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나처럼 아이들에게 신의 위대함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거라. 미술 선생님도 괜찮겠지.”



몬드리안은 열여덟 살 나이에 아버지의 뜻대로 초등학교 미술 교사 자격증을 땁니다. 아버지는 만족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몬드리안은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기보다 자신만의 예술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부 끝에 네덜란드 최고의 미술학교였던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이 시기 작품들에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몬드리안이 기본기도 없이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려놓고 심오한 추상화를 그렸다며 말로 때우는 그런 화가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아직 그는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20대 내내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 방황했습니다. 특색 없는 몬드리안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1898년과 1901년에는 최고의 미술상인 ‘로마 대상’에 응모했다가 낙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좌절한 몬드리안은 생각하게 됩니다. “일단 먹고 살고 봐야지. ‘팔리는 그림’을 그려야겠다.”
사랑을 버리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길이 지름길일 때가 있습니다. 몬드리안이 그랬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곳곳을 돌아다니며 빈센트 반 고흐,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등 선배 거장들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예술이 아닌 관광지 기념품 같다”며 그리기를 거부했던 종류의 그림들이었습니다. 촌스럽다며 그리지 않았던 꽃 그림도 그렸습니다. 하지만 막상 손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니 생각지도 못한 기쁨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정체돼 있던 몬드리안의 작품세계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몬드리안의 총천연색 작품은 네덜란드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미술계는 몬드리안을 ‘현대미술의 젊은 선구자’라고 불렀습니다. “내 모든 삶을 미술의 아름다움에 바칠 것”이라며, 광신에 가까운 열정으로 모든 시간을 작품 활동에 쏟았던 몬드리안에게도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습니다. 그러자 잘생기고 유망한 화가였던 몬드리안 곁으로 여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몬드리안은 그중 한 명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몬드리안은 사랑하는 사람과 약혼했습니다.

하지만 1909년, 몬드리안이 서른일곱살 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그의 삶은 뿌리째 뒤흔들렸습니다. 몬드리안에게 어머니는 정서적 안정과 휴식을 주는 유일한 존재. 그런 마음의 고향과 같은 존재를 잃은 몬드리안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몬드리안은 약혼을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으로, 예술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평론가들은 말했습니다.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느껴지던 경쾌하고 화려한 울림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 후 몬드리안은 평생 예술에만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에게 친구는 있었지만 친한 친구는 없었습니다. 잠깐의 가벼운 연애는 있어도, 결코 진지하게 누군가를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몬드리안에게 예술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곁을 허락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고 양보한다는 것. 그러므로 몬드리안에게는,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준다는 게 자신이 꿈꾸는 예술의 일부를 버린다는 뜻이었습니다.

영국의 문호 서머싯 몸은 대표작인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에 이런 문장을 적었습니다. “그는 항상 미래 속에서 살았고, 현재는 언제나, 언제나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몬드리안의 삶이 꼭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예술이라는 미래를 위해,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몬드리안은 1911년 프랑스 파리로 향합니다. 당시 현대미술의 최신 주자이자 세계 최고의 화가였던 피카소의 그림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피카소는 ‘선’에 집중해 세상을 단순화시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찾는 미술의 힌트가 저기에 있어.” 파리에 정착한 몬드리안은 선으로 많은 것들을 단순하게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몬드리안의 머리에 조금씩 답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때까지 화가들의 목표는 하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그림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문호 발자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은 자연이 만들 수 없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몬드리안도 생각했습니다.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걸 만들고 싶다.’ 그래서 몬드리안은 자연의 형태를 간단하게 표현하고, 정제해서 더욱 핵심만 남기고, 불필요한 게 전혀 없을 때까지 단순화했습니다. 아래가 그 결과물입니다.




“모든 걸 가장 기본적이고 순수한 형태로 표현하자”는 이런 몬드리안의 생각을 ‘조형주의’라고 합니다. 예컨대 나무를 생각해 봅시다. 보통 화가는 나뭇가지와 잎사귀, 나무껍질 등을 자세히 표현합니다. 하지만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고,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진다고 해서 나무의 아름다움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몬드리안은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의 아름다움은 디테일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몬드리안은 나무의 본질을 수직선(나무 기둥)과 수평선(나뭇가지)으로만 표현했습니다.

더 나아가 몬드리안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단순하게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수평선과 수직선, 직사각형 등 기본적인 색과 모양을 조화시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려고 한 겁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은 세부적인 겉모양 때문에 생겨나는 게 아니다. 디테일은 오히려 아름다움이라는 본질을 제대로 보는 걸 방해한다. 그래서 미술은 대상을 그대로 보고 베끼는 게 아니라, 추상적이어야 한다.” 이런 철학은 오늘날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의 뿌리가 됐습니다.


하지만 몬드리안의 작품들은 100년 넘게 지난 지금 봐도 과격할 정도로 참신합니다. ‘그림이 이래도 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런 작품을 접한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 충격이 훨씬 더 심했습니다. 몬드리안에게 주던 후원금을 끊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몬드리안은 비난에도 묵묵히 자신의 철학을 고집했습니다.

몬드리안에게 자신의 예술은 혼란 속에서 질서와 의미를 찾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광신도 아버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어머니, 예측할 수 없는 미술계와 대중의 반응,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친구와 연인,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 그 혼돈 속에서 몬드리안은 자신이 발견한 단순한 아름다움을 길잡이 삼아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은 그가 종교 대신 찾은 ‘이 삶에서 추구해야 할 더 높은 가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몬드리안은 이 단순해 보이는 작품들을 완성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다. 마치 종교인이 정성껏 의식을 준비하고, 신에게 무엇을 바칠까를 고민하듯이.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몇 달이 걸렸습니다. 1년에 완성하는 작품은 다섯 점 남짓. 몬드리안은 그 시간의 대부분을 빈 캔버스를 바라보며 작업을 구상하는 데 썼습니다. 완성된 그림의 비율이나 색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덧칠해 새로 그렸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비율과 리듬의 조화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을 쓰고 있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단순한 색과 비율을, 고대 그리스 건축물이나 렘브란트 그림에 못지않은 고전으로 만드는 게 그의 목표였습니다.

이런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 몬드리안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은 점차 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그는 미술계에서 “피카소보다 더 추상적이고 더 현대적이다”는 평가를 받으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같은 미국의 건축 거장, 공산 국가로 막 거듭난 러시아의 정치 포스터 제작자, 아일랜드의 맥주 라벨 인쇄업자, 독일 바우하우스의 교수들, 전 유럽의 금속과 직물 디자이너까지 전 세계 사람들이 몬드리안의 독특한 기하학과 강렬한 원색을 사용해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1932년 몬드리안은 환갑을 맞았습니다. 이제 그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몬드리안의 작품세계가 궁극의 형태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몬드리안의 작품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했고,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편안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몬드리안은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승리!
몬드리안이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 뉴욕에 도착한 건 1940년이었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몬드리안은 식당에서 연주되는 부기우기(1920년대 후반 미국의 신나는 음악 스타일) 음악을 들었습니다. 신선함과 활기, 불꽃이 튀는 듯한 기분 좋은 자극, 그 경쾌한 속에 숨겨진 탄탄한 기본기와 우아함. 몬드리안이 좋아했던 모든 것이 그 음악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음악과 춤을 사랑했던 몬드리안은 긴 여행의 피로를 잊고 박수쳤습니다. “정말 대단해!”



뉴욕은 이미 완성돼 멈춰버렸다고 생각한 그의 예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줬습니다. 뉴욕에서 새로 발견한 색 테이프라는 재료를 활용해 몬드리안은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소장 중인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입니다. 지저귀는 새 소리, 다급한 경적 소리, 사이렌 소리, 그리고 그 밑에 흐르는 삶의 리듬. 대도시 뉴욕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불협화음을 몬드리안은 캔버스에 담아 눈으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뉴욕에서도 몬드리안은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는 주기적으로 MoMA에서 최근 작품들을 전시했습니다. 명사들이 그의 주위에 몰렸습니다. 하지만 몬드리안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가로선과 세로선으로 구성된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여전히 그가 보기엔 뉴욕의 매력을 다 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몬드리안이 그리고 싶은 건 딱딱한 느낌이 훨씬 덜하고, 실제로 음악이 들려오는 듯한, 연주자들과 관객들의 열기와 열정이 전해지는 듯한, 그러니까 더 역동적인, 아니 더 인간적인 그림이었습니다.

세상, 그리고 사람과 거리를 두며 차가운 이성으로 작품을 그려 거장이 된 몬드리안이 말년에 이르러 뉴욕에서 발견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불완전하고 충동적인 인간적인 열정이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여기, ‘승리 부기우기’에 있습니다. 작품명의 ‘승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기원한다는 의미. 덧없는 인간사를 작품에 담기 꺼렸던 몬드리안치고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승리라는 제목은 자신이 새로운 예술을 깨닫고 성취했다는 일종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승리 부기우기에서 몬드리안이 추구했던 깔끔한 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형태가 녹아 가물거리는 탓에 선과 면은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뿐이고, 칼 같았던 작품의 리듬은 거칠고 야성적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이 작품은 역동적이고 인간적입니다.

이 작품은 몬드리안의 유작이자, 미완성 작품이기도 합니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승리 부기우기’ 제작에 몰두하던 몬드리안은 안타깝게도 1944년 72세의 나이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캔버스에 그려진 이 그림에서는 여전히 맥박이 뛰는 듯합니다. 그가 남긴 예술의 유산이 이 세상 곳곳에서 계속되는 것처럼요.



몬드리안이 만들어낸 검정과 원색, 직선과 직각이 이루는 세계는 오늘날 우리의 삶 속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스마트폰과 인터페이스 디자인, 옷, 건물 외관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몬드리안의 유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QR 코드까지요.

그의 작품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는 인간의 영원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단순함이 곧 진리라는 믿음으로, 몬드리안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추구할 만한 더 높은 아름다움을 남겼습니다. 덕분에 그의 직선과 색상은 단순한 예술을 넘어 전 세계 디자인과 삶의 미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발견한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토록 멀리하려 했던 인간적인 것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승리 부기우기’에 담긴 뜨거운 열정은 완벽한 단순함을 추구하던 예술가가 마침내 불완전한 인간의 마음을 받아들였다는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몬드리안의 예술은 혼돈에서 시작해 차가운 이성으로 완성됐고, 따뜻한 감성으로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그의 마지막 붓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생각해보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아요. 뜨겁게 살아가세요.”

<i>*지난 22일 세상을 떠난, 삶의 마지막에 예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셨던 유창선 박사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
**이번 칼럼은 Mondrian: His Life, His Art, His Quest for the Absolute(Nicholas Fox Weber 지음), 피트 몬드리안 - 공간 속의 구조들(수잔네 다이허 지음), Piet Mondria : Life and work (Michel Seuphor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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