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등교육재단과 한국경제신문사는 지난 11월부터 약 두 달간 ‘한국의 과거 50년, 미래 50년’ 공동 기획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면 예상되는 미래는 무엇인지, 대한민국이 꿈꾸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지금 해야 하는 개혁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안하기 위해서다. 한경과 재단은 우리가 가야 할 미래상으로 ‘혁신적 품격사회’를 도출했다. 시민이 안심하고, 포용적이며, 활력 있고, 신뢰가 넘치는 생활을 일상으로 여기며 법과 행정 시스템에 대한 시민사회의 팽팽한 자발적 견제가 이뤄지는 것을 품격(格)을 갖춘 사회로 봤다.
하지만 그사이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고, 유럽엔 포퓰리즘 광풍이 불고 있다. 한국은 계엄과 탄핵이라는 정치적 급변 사태에 빠져들었다. 국격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내란’이라는 단어가 저잣거리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재단 교수진 9명은 “지금이야말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라며 “과거 방식을 답습하면 한국 사회는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비극을 맞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은 지난 100여 년간 연평균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2%를 꾸준히 유지했다”며 “심각한 정치 갈등과 급증하는 정부부채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조차 캘리포니아주 한곳에 못 미칠 정도로 미국이 초강대국 지위를 지키는 것은 9할이 파괴적 혁신 덕”이라고 짚었다.
한국 역시 해방 후 80년 동안 역성장을 거의 겪지 않았다. 선진 기술을 베껴 조금 더 낫게 만드는 ‘인크러멘털(점진적) 혁신’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송 교수는 “지금의 한국은 중국의 장쑤성 한곳의 경제 규모를 유지하기도 버거운 위기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파괴적 혁신이 절실하다”며 “정치인, 교수, 기업인 등 사회 지도층 대다수가 미국의 인공지능(AI)산업 지배, 유럽의 기후위기 대응 등 급격한 외부 변화를 밀어둔 숙제나 남의 일처럼 얘기한다”고 했다.
재단 교수진은 최우선 과제로 제도화된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선 같은 정당에서조차 미래 권력이 현재 권력을 끌어내리려 해 정책의 연속성이 끊긴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좌우를 대표하는 정당의 정책을 시민이 확인할 루트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배심원제 같은 시민 상원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양쪽 20%를 합하면 40%인데 현재 한국의 정치 제도는 이들이 번갈아 가며 100%를 독식하는 구조”라며 “탄핵 집회에서 풍자와 익살이 가득한 플래카드를 든 ‘중간의 60%’를 위한 선거제도와 정책 경로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정서적 내전 상태의 선거 경쟁을 극복할 개헌과 선거법 개정, 정책 경쟁 중심의 정당정치로 전환하지 못하면 마비된 대통령제 정부, 선거만 유지되는 민주주의라는 미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 같은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막으려면 규제 개혁과 동시에 세금을 통한 소득재분배 방식을 좌우 세력 모두 화두로 꺼낼 수 있어야 한다고 교수진은 입을 모았다. 송 교수는 “좌파는 규제로 외부에서 오는 파도를 지연하려 하고, 우파는 경쟁을 통해 효율성만 높이면 낙수효과가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좌우 둘 중 하나의 방식만으로는 외부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외부 변화를 사회가 껴안을 수 있게 하려면 규제를 없애야 한다”며 “의료 시스템 개혁만 해도 의사 수를 얼마나 늘리냐에 집착할 게 아니라 원격 의료 등 AI를 활용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도록 의사 집단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문재인 정부 때부터 좌파 진영의 주요 경제 테마인 ‘시장 소득의 균등화’를 ‘가처분 소득의 재분배’ 프레임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박동휘/강영연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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