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도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권위주의적 퇴행과 민주주의의 토대가 흔들리는 현상이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어요. 유럽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의 위기인지 아니면 민주주의의 강인한 회복력을 시험하는 일이 될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회복력이란 어떤 개념입니까.
“얼마 전 옥스퍼드대에서 그 주제로 세미나가 있었어요. 민주주의 제도 연구자인 벤 앤셀 교수는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불신 등이 민주주의 체제를 약화시킨다고 설파하면서도 정치와 공공 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면 민주주의가 내재적 회복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강조하더군요.”
▷어느 쪽으로 갈지 갈피를 잡기가 힘든데요.
“맞아요. 그런 난점이 미래학(시나리오 플래닝)이 서 있는 지점입니다. 예측할 수 있는 미래는 없습니다. 정부와 기업 등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리더들은 미래학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죠.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에 따라 실제로 조직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를 들어볼게요. 정부와 기업 모두 내년 혹은 5~10년간의 미래를 예측하려 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예측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처할 능력을 키우는 겁니다.”
▷‘시나리오 경영’을 말하는 건가요.
“옥스퍼드의 ‘시나리오 플래닝’은 기존 접근법과는 다릅니다. 최선, 최악의 시나리오를 뽑아내는 확률적 접근이나 미래를 특정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규범적 접근이 아니라 이른바 ‘TUNA 조건’(변동성,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성, 참신성, 모호성)이라 불리는 상황에서 기업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제시합니다.”
▷한국 비상계엄 사태가 TUNA 조건에 들겠네요.
“그렇습니다. 복잡성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세 번째 대통령 탄핵으로 오히려 탄핵이 한국의 정치적 상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한국이 직면할 불확실성은 밖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합니까.
“수단 우크라이나 중동의 전쟁 등으로 인해 안보 이슈가 더 커지고 있어요. 세계적으로 인구 구조 변화도 불확실성의 또 다른 요인이고요. 증가하는 불평등과 정부 부채 역시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출범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올해 새로 출범한 옥스퍼드-HMG포어사이트센터는 6개 주제를 정할 예정인데, 우선 두 가지 초기 주제를 골랐어요. 그중 하나가 동북아시아 지정학입니다. 영국과 같은 섬나라와 달리,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경계에서 중요한 교차점에 있어요. 복잡하고 다면적인 미·중 갈등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간의 오랜 대립 그리고 지리적으로 광범위한 경쟁의 맥락에서 이해돼야 하죠.”
▷영국도 양자택일의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미국과 유럽연합(EU) 중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모든 시나리오를 가정해봐야 합니다. 다만 영국은 여전히 미국의 ‘혁신파워’(혁신을 스케일업할 수 있는 역량)에 어떻게 맞설지 고심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수많은 영국의 혁신 사례를 뜯어보면 스케일업(신생 아이디어를 산업화하기 위한 과정)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이뤄지곤 했어요. EU 외에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는 이 같은 불균형으로 인해 계속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왜 영국조차 이렇게 뒤처진 건가요.
“너무 많은 지도자와 정책 결정자들이 여전히 과거 제국의 영광에 얽매여 있어요. 이 같은 관념이 적절한 정책과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데 방해물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폴란드에도 뒤처질 수 있다는 비관적인 정서가 퍼지고 있어요.”
▷실제로 그렇습니까.
“폴란드 경제가 2025년에 영국 경제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영국 지도자는 자국 경제 규모를 실제보다 더 크다고 여기고 있어요. 런던 금융시장은 중요하고, 영어는 여전히 국제 비즈니스의 주요 언어입니다. 그리고 영국은 로큰롤의 발상지이자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이 있는 곳이며 축구와 테니스의 원조죠. 하지만 이런 소프트파워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K컬처 강국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있네요.
“정부건 기업이건 조직의 리더는 무엇이 변하고 있는지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변화의 동인을 간과하면 불확실성에 대처할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미국 우선주의의 영향이 커질 듯합니다.
“미국의 힘은 에너지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셰일혁명 덕분이죠. 독일이 러시아 가스관에 의존하려 했던 것도 미국에 뒤처진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어요.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유럽 각국은 방위비에 재정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유럽 위기론이 대두하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오랜 평화에 매혹된 탓에 아주 작은 불꽃만으로 전쟁의 늪에 쓸려간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대가 떠오릅니다. 현재 유럽의 위기를 촉발한 요인은 복합적이에요. 전통적인 정당의 신뢰성과 유권자 선호도에 미치는 소셜미디어와 인구통계학적 요인의 영향, 불평등의 심화, 리비아사태와 시리아전쟁이 촉발한 이민 위기 그리고 기후 변화의 영향 등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겹치며 위기론을 만들고 있는 것이죠.”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페이스북에 등록된 사용자가 세계의 은행 계좌 수보다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사기업이 공공재를 제공하는 것(사용자가 고객인 경우)과 권리로서 정부 등이 공공재를 제공하는 방식(사용자가 시민인 경우) 사이의 혼란이 현재는 전자(고객 중심)의 틀이 후자(시민 중심)의 틀보다 우세한 상황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소비자가 시민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 제게는 혼란으로 다가옵니다.”
▷한국도 이민 확대를 고민하고 있는데요.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강력한 요인 중 하나가 저출생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유럽도 이민을 확대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이민으로 인해 발생할 다양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예요. 한국도 이민을 확대하려면 어떤 국가에서 어떤 사람들을 이민자로 받아들일 것인지 내부적으로 명확히 합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가 대표적이다. 2005년 사이드경영대학원에서 출범한 ‘옥스퍼드 시나리오 프로그램’은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한 기업의 행동과 관련해 미래학이라는 학문 도구로 해법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라파엘 라미레스 교수가 2010년부터 현재까지 프로그램 디텍터를 맡고 있다.
국내에선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옥스퍼드대와 제휴해 올 5월 옥스퍼드-HMG 포어사이트센터를 설립했다. ‘피크 코리아’라는 비관론에서 벗어나려면 대증 처방을 넘어 문제를 만들어낸 시스템과 메커니즘 그리고 그것이 전제하는 마인드세트에 대한 비판적이고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한경이 ‘빅 퀘스천’을 제기하는 이유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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