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는 오는 20일을 기점으로 국제통상 질서는 큰 변화를 맞을 것이 확실시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최악의 경우 미·중 거대 시장이 쪼개져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의 일본 ICT 산업처럼 한국 수출이 직격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한국은 중국에 컴퓨터, 반도체 등 중간재를 수출하고, 미국에 자동차 등 완제품을 수출하고 있어서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한국 수출의 20%(약 1300억달러)를 차지하는 1~2위 시장이다.
대부분 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피아식별에 구애받지 않고 관세 폭탄을 터뜨릴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의 제조업을 부활하고, 전통 제조업 중심지인 ‘러스트 벨트’ 지역을 회생시키는 것이 필수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5년간 6%포인트 감소해 10% 아래로 떨어졌다.
미국이 관세 장벽을 세우면 세계는 모두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이소노 이쿠모 아시아경제연구소 그룹장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에 60%, 그 외 모든 나라에 2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하면 2027년까지 미국 GDP가 2.7%, 중국과 세계 GDP는 0.9%와 0.8% 감소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미국이 한국에 보편 관세 10~20%를 매기면 한국 수출액은 222억~448억달러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과 중국 시장이 쪼개지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피해는 더 커질 전망이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해 11월 25일 한경 밀레니엄포럼에서 “미국이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MFN) 지위를 박탈하는 경우 중국이 맞대응에 나서면서 전면적인 무역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시장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상황을 강요받을 수 있다. 혼다와 무라타제작소 같은 일본 대기업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벌써부터 조달 및 생산 체제를 미국과 중국용으로 분리하고 있다
하지만 통상 지도를 좀 더 넓게 펼쳐보면 우리의 통상 환경이 우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통상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세계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다자무역 체제는 힘을 잃어가지만 지역별 다자무역 체제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동아시아에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등 지역 경제협력 체제가 경쟁하고 있다.
한국도 교역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 지역 경제협력 체제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은 RCEP과 IPEF 회원국이지만 CPTPP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 호주, 싱가포르 같은 경쟁국들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3대 경제협력 체제에 모두 참여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RCEP이나 CPTPP보다 더 작은 규모의 ‘소(小)다자무역 체제’를 검토할 때라는 주장도 나온다. 소다자무역 체제는 참여국 수가 적어 합의를 도출하기 쉽고, 각 지역의 경제적·문화적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협력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은 신흥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다.
세계 최대 자유무역지대인 AfCFTA를 결성한 아프리카, 인구 2억6000만 명의 거대시장 메르코수르(남미국가 경제공동체), 에너지·인프라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중앙아시아 등으로 시야를 넓히면 경제운동장을 3대 교역시장 밖으로 넓힐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앙아시아와는 에너지·자원 협력 강화 디지털 실크로드 구축 등을, 아프리카와는 아프리카대륙자유무역지대(AfCFTA)를 활용한 인프라·보건의료 분야 협력 확대 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남미, 중앙아시아는 새롭게 부상하는 ‘글로벌 사우스’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과 중국, EU 등 경제대국은 일찌감치 글로벌 사우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지역 진출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EU는 민주화, 인권, 환경 분야에서 선진국 수준의 높은 기준을 요구해 글로벌 사우스와 갈등을 빚고 있다.
통상당국 관계자는 “툭하면 경제 보복을 일삼는 중국에 대한 글로벌 사우스의 경계심도 높아졌다”며 “한국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데다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에 해를 끼친 적이 없는 무해한 나라’라는 이미지도 강점”이라고 말했다.
소다자무역 체제를 이끄는 데는 치러야 할 비용도 만만찮다. 다자무역 체제를 만드는 데는 중핵이 될 국가가 필수적이고, 중핵 국가는 희생을 강요받는다. 또 다른 통상당국 관계자는 “전 세계 국가를 자유무역 체제에 편입한 대가로 미국은 1975년 이후 한 번도 무역흑자를 달성한 적이 없다”며 “소다자무역 체제를 운영하는 데도 관리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3대 시장에 쏠린 우리나라 외교·통상 조직과 기업의 영업판매 네트워크도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