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 같은 가격 설계 공식이 깨지고 있다. 판매가를 먼저 정한 뒤 이를 넘기지 않도록 원가와 마진율을 맞추는 ‘가격 역(逆)설계’가 유통업계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고물가와 불경기 장기화로 소비 침체가 심해지자 상품 가격을 10원, 100원이라도 낮추려는 기업의 고육지책이다.
킴스클럽은 일본 마트에서 델리 식품을 100~300엔대에 판매하는 것에서 착안해 소비자의 심리적 가격저항선을 ‘3990원’으로 설정했다. 기존 상품 설계 방식대로라면 8000원대에 팔아야 하지만 목표가를 맞추기 위해 식재료 통합 매입 등을 통해 원가를 낮추고 마진을 줄였다. 파격적인 가격 덕분에 델리바이애슐리는 출시 9개월 만에 판매량 300만 개를 넘어섰다.
이 같은 상품 기획 방식은 원래 일본 100엔숍, 미국 달러숍, 한국 다이소처럼 균일가 생활용품점이 주로 쓰는 방식이다. 1000원, 3000원, 5000원 등 소비자 판매가를 균일화한 뒤 재료비, 각종 비용, 마진율을 여기에 맞춘다. 이렇게 하면 상품 한 개당 마진은 줄어들지만 소비자 체감 물가가 낮아져 한 사람당 구매하는 상품은 더 늘어난다. 킴스클럽 관계자는 “3990원 델리 식품이 워낙 저렴하다 보니 한 개 사려다가 두 개 사고, 두 개 사려다가 세 개 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기존엔 안 팔던 ‘B+급 상품’도 등장했다. 롯데마트는 원래 개당 크기가 27㎜ 이상인 체리만 팔았는데 최근 기준을 24㎜로 완화했다. 그 대신 100g당 가격을 기존 대비 25% 낮췄다.
바나나 최소 판매 규격도 송이당 5~7개에서 3~5개로 바꾸고 일반 상품 가격 대비 50% 낮게 설계했다. 편의점 이마트24는 최근 ‘업계 최저가’를 목표로 정한 뒤 가격 역설계 방식으로 1900원짜리 PB 김밥을 선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 위해 유통업계가 ‘초저가 전략’에 힘을 쏟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소비심리가 괜찮을 때는 소비자가 가격 이외에 품질, 디자인 등을 보고 제품을 사지만 최근엔 가격이 구매 결정에 최우선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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