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열차' 한발 올라탄 韓…장기불황 터널로 달려가나

입력 2025-01-06 17:41   수정 2025-01-07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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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한국 정치 지형을 포퓰리즘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장훈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명예교수는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연구 보고서인 ‘대한민국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에서 “이미 정치적 양극화와 포퓰리즘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책 경쟁 없는 정치 경쟁’이 만연해 ‘정서적 내전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은 “반이민과 반세계화를 기치로 내건 유럽의 포퓰리즘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정치내전>을 통해 유럽 극우 포퓰리즘의 국내 유입 가능성을 고찰한 유창오 정치평론가도 “아직은 포퓰리즘 논리가 양당제 국가인 한국 등에선 힘을 얻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의견이 엇갈리긴 하지만 한국이 ‘포퓰리즘 폭풍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는 데 전문가들이 대체로 동의한다. 중도의 민의를 껴안지 못하는 선거 및 정당 정치, 저성장 고착화에 따른 젊은 층의 경제적 불안, 재정 악화를 개의치 않는 정책 선명성 경쟁 등이 포퓰리즘의 위험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갈수록 공공기관 불신 커져
전문가들은 포퓰리즘 징후로 ‘기존 체제 불신’을 꼽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20년 이상 대부분 산업화 국가를 지배한 진보 정치가 힘을 잃고 있다”며 “노동계층 유권자들이 학자에서 은행가, 기성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기존 체제를 불신하며, 이런 엘리트들이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면서 우경화의 주요 동력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가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사례다.

미국, 유럽연합(EU) 등과 정치 지형이 다르긴 하지만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행정연구원이 매년 조사하는 사회통합 실태에 따르면 주요 기관의 신뢰도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2021년 34.4%인 국회에 대한 만족도는 2023년 24.7%로 추락했다. 중앙정부 부처(56.0%→53.8%), 대기업(56.7%→54.5%), 법원(51.3%→48.5%), 검찰(50.1%→44.5%), 경찰(55.3%→51.4%), 노동조합(47.8%→37.7%), TV 방송사(55.3%→49.6%), 신문사(50.1%→44.4%), 시민단체(53.3%→43.6%) 등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은 특히 사법 불신을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정치의 사법화 그리고 사법의 정치화가 최근 계속 나타나 정치의 가치,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지연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기존 정치적 채널이 쇠퇴하고, 전통적인 미디어의 영향이 약해지면서 소셜미디어, 유튜브 등과 같은 새로운 정치 채널이 출현하고 있다”며 “너무나 많은 정보가 유통되고 있고 흔히 말하는 가짜뉴스 등의 문제 역시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장 명예교수는 “민주주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능력이 필요한데 국가 능력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 지금 한국 정치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돈 뿌리기’ 선거 재연되나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 심판대에 오를 가능성이 커지면서 한국 정치는 포퓰리즘의 격랑에 빠져들 공산이 크다. 2010년대 이후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현직 대통령이 포퓰리즘 정책에 더 큰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20년 21대 총선과 2024년 22대 총선이 단적인 예다. 정치권에서는 두 선거를 ‘돈 뿌리기 공약’에 영향받은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21대 총선에서는 선거 한 달 전만 해도 야당의 우위가 점쳐졌지만, 선거가 임박해 재난지원금 지급이 결정돼 판세가 뒤집혔다. 야당이 압승한 22대 총선에선 야당의 ‘전 국민 25만원 지급 공약’이 영향을 미쳤다.

탄핵안 처리 이유는 다르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모두 4월 총선의 여당 패배, 12월 국회의 탄핵안 가결에 이르는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정치권 관계자는 “임기 중에 치러지는 지방선거나 총선이 단순한 ‘중간평가’를 넘어 정권의 존망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판단을 집권 세력이 내릴 가능성이 크다”며 “누가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든 2026년 지방선거와 2028년 총선 승리를 위해 대중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구사하려 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라고 분석했다.

포퓰리즘 열차는 한 번 올라타면 내리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독일 킬세계연구소의 모리츠 슐라릭 소장과 마누엘 푼케 박사 등은 지난해 1월 ‘포퓰리스트 지도자와 세계 경제’라는 논문을 발표해 경제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00년부터 2020년까지 28개 국가에서 집권한 포퓰리즘 지도자가 국가 경제를 얼마나 후퇴시켰는지 분석한 것이 주 내용이다. 슐라릭 소장은 “포퓰리스트 정권이 집권하고 15년이 지나면 정상적으로 성장했을 때와 비교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가량 줄어든다”고 결론 내렸다.
“포퓰리즘, 성장의 지속 가능성 무너뜨려”
포퓰리즘 정책은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소비와 경제 성과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는 정치 불안정과 경제 제도 쇠퇴까지 조장해 성장의 지속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2년 연속 세수 결손으로 90조원 가까이 예상 이상의 재정적자가 쌓인 가운데 올해도 경기 침체로 세입이 충분치 않을 전망”이라며 “선거 국면에서 무리한 감세 정책이 나오면 재정 안정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포퓰리즘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유권자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세바스티안 에드워즈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교수와 루디거 돈부시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가 오랜 사례 연구를 통해 기준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지속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재정적자와 돈풀기, 생산성 향상과 상관없는 공무원 및 공기업 근로자의 임금 인상을 통한 소득 재분배, 장기적으로 급격한 물가와 실업률 상승 촉발 등이다. 공공부문 고용 증가와 최저임금 인상 등이 포함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정기적으로 일정한 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과 ‘안심소득’ 등도 이 같은 범주에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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