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쇼크를 감안한 하향 조정이지만, 문제는 그 이전부터 이미 1%대 전망이 대세였다는 점이다. 1%의 공포는 역사에서 금방 확인된다. 1954년 집계 이후 성장률이 2% 미만이었을 때는 전쟁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1956년과 1980년 대혼란기,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그리고 2023년 등 총 여섯 번뿐이다. 특별한 외부 충격이 없었는데도 1%대 성장에 그친 것은 2023년이 유일하다. 수출 부진이 주요인이었다. 김세직 서울대 교수가 1995년 이후 한국의 장기성장률이 5년마다 1%포인트씩 내려가는 ‘5년 1% 하락의 법칙’을 얘기했는데, 1% 저성장 시대의 지옥문이 열린 것 같아 께름칙하다.
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과거 6% 이상의 고도성장을 맛본 뒤 50년 이상 지속해서 내리막길을 걷다가 성장률이 0%대로 떨어진 곳이 일본과 스페인, 마이너스로 추락한 곳이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스다. 이 다섯 나라 중 플라자 합의와 미·일 반도체 협정이라는 유례없는 극도의 외압에 기세가 꺾인 일본을 제외하면 나머지 네 곳은 스스로 무너졌다. 결국 유럽 재정위기까지 촉발한 ‘PIGS’ 4개국이다.
성장 동력을 상실한 상황에도 퍼주기 복지 정책으로 나라 곳간을 구멍 내고 유로존 전체에 위기를 불러왔었다. 이 중 맏형 격이 이탈리아다. 1980~1990년대만 해도 영국을 앞서 세계 5위였던 이탈리아는 이제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우리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수준이다. 인구도 5800만 명으로 비슷하다. 무엇보다 닮은꼴은 사회 전체를 마비시키는 정치 갈등이다.
이탈리아는 1946년 공화국 수립 이후 79년간 정부(내각)가 69번이나 바뀌었다. 거의 1년에 한 번꼴이다. 총리도 31명째다. 의회는 권한이 똑같은데도 상·하원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의원 수가 945명이나 됐다. 일곱 차례 시도 끝에 2022년 의원 수를 줄인 게 600석이다. 독일 등 유럽의 다른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정부 위기 시 의회 과반의 동의가 있어야 정부 교체가 가능하도록 안전장치를 두고 있는데, 이탈리아는 소수 정당에 의해 내각이 붕괴하는 ‘왝더독’ 현상이 왕왕 일어난다. 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자가 출현하지 않도록 오로지 분산에 초점을 맞춘 정치 시스템으로 독재는 피했을지 모르지만, 극심한 비효율과 무정부에 가까운 정치 혼란을 초래했다. 흡사 견제와 균형만 의식한 한국의 87체제가 탄핵 남발과 입법 폭주로 국정을 교착에 빠트리는 ‘괴물 의회’를 태동시킨 것처럼 말이다.
작가 조귀동이 쓴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는 예리한 대목이 나온다. 한국 다음으로 출산율이 낮은 OECD 국가는 이탈리아 그리스 일본 스페인 순인데, 이 역시 일본을 빼면 모두 PIGS 국가다. 이와 관련해서도 한국과 이탈리아는 큰 공통점이 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고착화돼 있다는 것이다. 2부 리그의 삶에서 1부 리그로 진출이 극히 제한적이거나 불가능한데 양육할 겨를이 있겠으며, 누군들 자식에게 그 짐을 물려주고 싶겠는가.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는 지난해 성장률을 다소나마 회복했는데, 코로나 보복 관광의 수혜일 뿐 성장 동력을 복원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탈리아 경제가 추락한 일차적 원인은 제조업의 몰락이다. 포천 500대 기업에 이탈리아는 5개로 대만(7개)보다도 적다. 사업가들이 노조 설립 의무가 없는 15인 이하 기업에만 안주하려고 해 규모의 경제가 실종된 탓이 크다. 자본과 노동 투입에 한계가 있는 상태에서 경제를 키울 수 있는 힘은 생산성이다. 제도, 기술, 기업가정신, 근로의욕 등의 총합이다. 생산성을 추동하는 것이 개혁이요, 이는 곧 정치의 산물이다. 이탈리아나 한국이나 정치 병목에 걸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사회”가 됐다. TV를 살 때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지만, 정치 상품을 잘못 고르면 나라가 결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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