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챗GTP 순간이 오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올해 CES 기조연설에 14대의 로봇과 함께 등장했다. 두 발로 설 수 있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휴머노이드 로봇이었다. 챗GPT가 AI 혁신을 가져온 것처럼 로봇 기술의 새로운 도약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빅테크 격전지 된 휴머노이드 로봇
일찍이 로봇에 뛰어든 테슬라, 현대차그룹뿐만 아니라 도요타, 삼성전자 등 수많은 기업들이 로봇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2024년 마지막 날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인수하며 로봇 경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CEO 직속의 ‘미래로봇추진단’을 설립해 본격적인 연구개발에도 나섰다.
미래로봇추진단장은 레인보우로보틱스 창업자이자 한국의 1세대 휴머노이드로봇 ‘휴보’ 개발자인 오준호 교수가 맡았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CES 2025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전자가 로봇 분야에 대해 그다지 빠르다고 볼 수는 없지만 투자를 통해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젠슨 황의 기조연설을 언급하며 “휴머노이드 계획이 빨라질 것 같다. 우리도 휴머노이드까지 같이 간다”고 말했다.
한 부회장이 말한 것처럼 삼성전자는 로봇 기술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없다. 현대차그룹은 2021년 미국 로봇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했고 테슬라는 2021년 인간형 로봇 개발 계획을 발표한 후 2022년 10월 휴머노이드 ‘옵티머스’의 프로토타입을 공개했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로봇 투자에 늦게 뛰어든 이유가 ‘시장성’ 때문이라고 본다.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한국로봇산업협회 상근부회장)는 “그동안 로봇 시장이 전통 자동화 장비에 그쳤던 만큼 삼성전자는 ‘로봇에 투자하더라도 당장 몇 년 안에 매출이 발생할 수 있냐’를 고민 했을 것”이라며 “한국은 여태껏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로봇 시장에 진출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기술개발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반대로 삼성전자가 휴머노이드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이 시장이 미래 먹거리일 뿐 아니라 ‘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2021년 테슬라가 처음 ‘옵티머스’ 계획을 선보였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휴머노이드 로봇의 상용화와 시장성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전통 로봇이 오랜 기간 산업용 자동화 장비로만 활용돼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율주행 전기차 기술의 발전과 AI 기술의 발전으로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 속도 역시 앞당겨졌다. 전문가들은 휴머노이드 로봇의 등장으로 로봇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자동화 장비’ 수준에 그쳤던 기존 로봇과 다른 점은 기술적 진보가 한꺼번에 결합됐다는 것이다.
기존 로봇이 알고리즘에 따라 반복작업을 수행했다면 첨단 로봇은 AI 두뇌를 탑재해 인지와 추론이 가능해졌다. ‘집게손(그리퍼)’이 전부였던 로봇에 ‘손가락’이 생겼다는 건 물리적인 기술의 진보를 의미한다. 테슬라의 옵티머스는 손가락으로 계란을 잡아 올려 냄비에 삶는 작업까지 할 수 있다. 초소형 감속기와 센서 기술이 발전하면서 정밀한 작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박 교수는 “로봇의 개념은 ‘전통로봇’과 ‘첨단로봇’으로 구분되는데 첨단로봇은 단순 자동화 설비를 넘어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감지·인식·상호작용이 가능한 기술을 의미한다”며 “첨단로봇을 둘러싼 시장, 플레이어, 기술이 모두 새로 짜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이점’ 도달하며 손가락 생기고 AI 두뇌 탑재
로봇이 ‘특이점’에 도달한 것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한꺼번에 진화한 결과다. 현재 휴머노이드 로봇 발전은 자동차 산업의 발전이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변화하면서 배터리 기술과 로봇의 시각을 담당하는 머신비전 기술이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전기차가 완전자율주행 단계에 이르면 그것이 바로 로봇”이라며 “휴머노이드 로봇은 배터리 기술의 발전으로 사용시간과 이동성이 발전했고 전기차에 적용되는 라이다센서, 반도체 기술이 로봇에 그대로 적용되면서 로보틱스 진화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감속기, 센서, 모터 등 핵심 부품 역시 전기차 발전과 함께 진화했다. 여기에 챗GPT로 AI가 특이점에 도달하면서 로봇의 ‘두뇌’ 발전까지 맞물렸다. 반복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인지와 판단에 따른 행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테슬라가 가장 적극적으로 휴머노이드 개발에 뛰어든 것도 자율주행 전기차 기술을 휴머노이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옵티머스는 학습과 추론을 통해 배우지 않은 동작도 수행할 수 있다. 최근 테슬라는 비탈길에서도 균형을 잡는 옵티머스 영상을 공개했다. 카메라 없이 신경망 센서만으로 이뤄낸 동작이다.
테슬라는 2026년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정식 출시를 목표로 제품 고도화에 집중하고 있다.
TSMC 회장 웨이저자는 지난해 대만 국가과학기술회의에서 “며칠 전 세계 최고 갑부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앞으로 힘써야 할 분야는 자동차가 아닌 휴머노이드 로봇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웨이 회장은 ‘세계 최고 갑부’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중화권 매체들은 웨이 회장이 일론 머스크와 만나 대화했다고 전했다. 테슬라는 2026년 옵티머스 1000대를 기가팩토리에 배치에 자동차 생산에 나설 예정이다.
테슬라와 함께 미국에서 휴머노이드 선두주자로 꼽히는 기업은 피규어AI다. 피규어AI는 챗GPT 개발사인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엔비디아, 인텔이 모두 투자한 기업이다. 이 회사가 최근 공개한 로봇 ‘피규어02’는 BMW 미국 공장에 투입돼 시험 작업을 하고 있다.
중국은 높은 기술력과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휴머노이드 상용화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중국 기업 유니트리가 출시한 가사용 로봇 ‘G1’은 가격이 1만6000달러(약 2300만원)에 불과했다. G1은 1.3m, 35kg으로 팔·다리·몸통의 관절 43개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미세한 손가락 제어도 가능해 프라이팬의 음식을 뒤집는 것도 가능하다.
중국 전기차 기업 샤오펑은 최근 휴머노이드 로봇 ‘아이언(Iron)’을 출시했다. 자체 개발한 AI 반도체를 장착했고 복잡한 언어를 이해하고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샤오펑의 광저우 전기차 공장에서 실습 중이며 ‘P7+’ 모델의 생산 공정에 참여한다는 계획이다.
반면 한국의 첨단로봇 기술은 초급 수준에 머문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박 교수는 “한국은 AI·센서·액추에이터 등 핵심 요소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정책·산업·과학기술 전반에서 많은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엔비디아 ‘코스모스’, 로봇계의 ‘쿠다’ 될까
엔비디아는 휴머노이드 소프트웨어 생태계에 가세했다. 젠슨 황은 로봇·자율주행 개발 플랫폼인 ‘코스모스’를 공개하면서 “AI의 다음 개척지가 ‘피지컬AI’”라고 말했다.피지컬AI는 AI가 물리적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상호작용하고 탐색할 수 있는 기술을 뜻한다. 피지컬AI는 PC나 스마트폰으로 한정됐던 AI의 활약 무대를 현실로 옮기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엔비디아의 코스모스는 로봇이 현실 세계의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현실과 유사한 가상 세계(디지털 트윈)에서 형성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AI) 기반 자율주행차, 로봇 등을 학습시킬 수 있다.
업계에서는 코스모스가 엔비디아의 ‘쿠다’처럼 AI 생태계를 장악하는 표준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엔비디아는 2006년 AI 개발용 소프트웨어 ‘쿠다’와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로 생성형 AI 시장을 장악했다. 쿠다로 만든 프로그램은 엔비디아의 AI 반도체로만 작동하기 때문에 전 세계 기업들이 엔비디아의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섰다.
이미 업계에서는 애자일로봇, 피규어AI, 뉴라로보틱스, 애질리티, 힐봇 등 선도적인 로봇 기업과 함께 자율주행 스타트업 와비, 샤오펑 등 자동차 회사가 코스모스를 채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엔비디아는 올해 상반기 중 휴머노이드 로봇용 초소형 컴퓨터 ‘젯슨 토르’ 역시 출시할 예정이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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