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배송 전문업체 컬리의 배송 업무를 대신하는 배송기사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봐야 한다는 1심 법원 판단이 항소심에서도 유지됐다. 회사와 고용계약이 아닌 위탁계약을 맺고 업무 범위가 '새벽배송'에 한정됐더라도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고 임금을 받았다면 근로자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최근 법원이 배송기사의 근로자 지위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는 만큼 관련 업계에서는 인력 관리비용 증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서울고법 행정10-1부는 배송기사 A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는 컬리넥스트마일에 근로를 제공한 근로자로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른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판결한 원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재판부는 항소 비용 중 원고와 피고 사이에 생긴 부분은 피고가, 원고와 피고 보조참가인(컬리넥스트마일) 사이에 생긴 부분은 피고 보조참가인이 각각 부담하라고 했다.
A씨는 이커머스 기업 컬리의 물류 자회사인 컬리넥스트마일과 화물운송 위탁계약을 맺고 새벽배송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2020년 12월 22일 새벽 인천 서구에서 배송업무를 하던 중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사고로 골절 등 중상을 입었다. 그는 "업무상 재해를 당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 신청을 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A씨는 별도 사업자로 등록하고 회사와 위탁계약을 체결했으므로 산재보험법 적용 대상인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다"며 요양불승인을 결정했다.
택배기사는 산재보험법 제125조가 정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택배원)로서 산재보험법 적용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조사를 통해 '새벽배송'만 담당하는 A씨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사고 당시 A씨의 새벽배송 업무에는 산재보험법에서 정한 집화 과정이 없고, 수도권과 지방 등 물류 수송과정 없이 소비자가 주문한 물품을 화주의 요구에 따라 운송하는 업무만 수행했기 때문에 택배사업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불복한 A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심사청구를 했으나 기각됐고, 2022년 9월 이 사건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컬리넥스트마일이 사실상 A씨의 업무를 지휘·감독했다고 보고 2023년 7월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실제로 A씨는 사고 당시 화물 상차부터 배송 완료까지 모든 업무 과정을 회사가 제공한 모바일 앱에 입력했다. 회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체 대화방을 통해 A씨에게 업무 내용을 지시했고, 배송지역 조정·계약 해지 등의 처분을 내릴 수도 있었다.
A씨의 출근 장소와 담당 배송 지역이 특정됐고, 지정된 시간(다음날 오전 7시) 이내에 화물을 배송해야 하는 점과 회사로부터 운송료 등 명목으로 매월 480만원의 고정급을 받은 점도 근로자로 인정받은 근거가 됐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도 1심 판결이 정당하다고 보고 피고 측 항소를 기각했다.
이 사건은 배송기사의 근로자 지위 인정 여부를 다투는 사건에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을 인정한 첫 사례다. 그동안 배송기사에 관한 근로자 지위 관련 소송은 주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상 근로자’ 지위에 따른 교섭권 인정 여부가 쟁점일 때가 많았다.
이 사건 1심 판결 이후 쟁점이 비슷한 다른 사건에서도 배송기사 손을 들어주는 하급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은 작년 8월 모바일 세탁서비스 업체로부터 위탁받은 세탁물 새벽배송 업무를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입기사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지입기사의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지위를 인정했다.
법원이 배송기사의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관련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배송기사도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퇴직금, 각종 수당 등을 요구하는 일이 늘어남에 따라 인력 관리 부담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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