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에서 떠오른 '추경(추가경정예산) 편성론'이 현실화하면 국가부채 증가와 재정건전성 악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글로벌 신용평가사의 지적이 제기됐다. 고령화로 인해 복지 지출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확장적 재정 운영이 지속될 경우, 중장기적으로 신용등급 강등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Fitch)의 제레미 주크 아시아태평양 국가신용등급 담당 이사는 1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정치적 교착 상태가 지속되고,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예상보다 커지면 재정 지출을 늘리라는 압력이 증가할 수 있다"며 "이는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확대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정치권에서 힘을 얻고 있는 추경 편성이 재정건전성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피치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지난해 기준 약 47%로, AA등급 국가들의 중위값과 유사한 수준이다. 주크 이사는 "최근 통과된 (감액)예산에 따라 재정적자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하방 위험으로 기울어 있다"며 "지속적으로 높은 재정적자로 인해 정부 부채가 증가세를 보인다면 중기적으로 신용등급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가 재정건전성의 또 다른 위협 요인으로는 고령화를 꼽았다. 주크 이사는 "급속한 고령화는 한국 경제와 재정 전망에 있어 또 다른 중대한 과제(key challenge)가 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연금과 건강 관련 지출이 증가하면 재정 적자가 확대되고 부채가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피치는 S&P, 무디스 등 다른 글로벌 신용평가사와 마찬가지로 지난달 비상계엄 사태 이후에도 한국의 신용등급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유지하고 있다. 피치가 부여한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은 피치 등급 중 네 번째로 높은 AA-다. 등급 전망도 '안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주크 이사는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2.0%로 전망하고 있는데 최근 경제 지표가 예상보다 부진한 점을 감안하면 하방 위험이 있다"며 "높은 수준의 정치적 불확실성과 불투명한 정책 전망으로 인해 투자와 소비가 위축되면서 경제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러한 정치적 불확실성이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크지 않을 것(modest)이란 게 그의 예상이다.
관세 인상 등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조속히 대응해야 한다는 조언도 내놨다. 주크 이사는 "관세 부과 가능성에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하며, 단순한 협상 전략의 일환일 수도 있다"며 "한국의 경우 현재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미국에 대한 협상력을 일시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크 이사는 "트럼프가 모든 국가를 대상로 10%의 일률적인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소비를 감소시켜 한국의 대미 수출에도 부담을 줄 가능성이 크다"며 "현재 미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한국의 수출 실적에 부정적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그는 "미국이 중국의 수출품에 60%의 관세가 부과될 것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중국이 이에 대응하는 강력한 정책을 펼쳐 경제 성장의 급격한 둔화를 막을 것"이라며 "중국의 이러한 정책적 대응은 한국의 수출 감소를 제한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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