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 수출뿐 아니라 유지·보수·정비(MRO) 분야에서도 한국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지난해 11월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을 때만 해도 국내 조선업계는 긴가민가했다. 한국 업체가 미국 선박을 건조하거나 수리하려면 미 군함 및 상선의 해외 건조 및 수리를 막는 번스-톨리프슨 수정법과 존스액트법부터 뜯어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법 개정은 미국 내 일자리 감소로 이어져 트럼프 당선인의 ‘립서비스’에 그칠 것이란 해석이 많았다. 허언이 아님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국 ‘해군 굴기’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한국 조선업체와의 협업이란 판단에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예외 조항을 두는 방안을 구체화하고 있어서다.
미국은 번스-톨리프슨 수정법에 따라 군함 해외 건조 및 수리를 금지하고 있다. 국가 안보를 지키고 기술 유출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다만 예외 조항이 있다. 국가 안보 관련 긴급 상황이거나 기술적 이유가 있을 때만 해외 건조 및 수리를 허용한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6일 라디오 방송에서 “우리는 선박이 필요하지만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준비될 때까지 (다른 나라에) 입찰하겠다”며 예외 적용 가능성을 내비쳤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당선인 언급은 사실상 국가 안보, 기술 부족 등 예외 조항을 적용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됐다는 의미”라며 “이렇게 되면 연간 352조원에 달하는 미 해군 예산의 상당 부분을 한국 몫으로 돌릴 길이 열린다”고 말했다.
한국은 다르다. 미국의 ‘혈맹’인 데다 기술력으로 따지면 세계 1위다. 시설 여유도 있다. 미국은 주력인 이지스 구축함을 1년에 1.6~1.8척 제작하지만, 한국은 세 척 이상 건조할 수 있다. 건조 가격도 미국의 절반 이하다. 납기도 잘 맞춘다. 이지스 구축함 외에 초계함, 호위함 등 여러 군함을 만든 경험이 있는 것도 강점이다.
미국이 당장 눈독을 들이는 건 군함 분야다. 중국에 밀리는 해군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카를로스 델 토로 미국 해군성 장관과 토머스 앤더슨 미 해군 함정프로그램 총괄책임자 등이 지난해 잇달아 방한해 국내 조선업체의 함정 생산 능력을 꼼꼼히 확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 국방부 보고서 등에 따르면 작년 기준 중국의 해군 함정은 370척으로 미국(297척)보다 많다. 2000년만 해도 미국(318척)이 중국(110척)을 압도했지만 한순간에 역전됐다. 2035년에는 중국(475척)과 미국(317척)의 격차가 더 벌어진다.
미국의 고민은 자체 시설만으로 함선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작년 4월 미 해군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제너럴다이내믹스일렉트릭보트와 헌팅턴잉걸스인더스트리즈가 함께 건조 중인 컬럼비아급 탄도미사일 잠수함은 12~16개월, 버지니아급 잠수함 4번 블록은 36개월 지연됐다. 동맹국인 이탈리아 핀칸티에리마리네트마린에 맡긴 호위함 신규 건조도 36개월 밀렸다.
미국 정부로선 미국 조선업을 재건해야 중국과의 패권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고용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화오션이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화오션은 5년에 걸쳐 1억달러 이상을 투자해 필리조선소 공급망과 기반 시설을 재건할 계획이다. HD현대중공업도 미국 진출을 위해 조선소 인수를 따져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등과 달리 기술 인력 수천 명이 필요한 조선업은 미국 진출이 쉽지 않다”며 “하지만 함정 수주 등의 반대급부를 미국 정부가 요구할 가능성이 커 미국 투자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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