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비상계엄·탄핵과 환율 성적표

입력 2025-01-13 17:39   수정 2025-01-14 00:12

분초를 다투는 글로벌 투자자들은 환율 지표에 목맨다. 환율은 실시간 공개되는 나라 경제 ‘성적표’다. 국내총생산(GDP)·인플레이션·고용 등 거시경제지표는 1~3개월 지나야 나온다. 속도감이 떨어진다.

환율 성적을 잘 받으려 ‘뽀샵’하는 나라도 출현한다. 2022년 1월 달러당 77.4루블이던 러시아 루블화가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22% 급락(달러당 94.6루블)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루블화 가치가 곧바로 상승한 것이다. 그해 6월 1일엔 전쟁 전보다 무려 33.6% 폭등했다. 독재국가도 공들여 관리하는 껄끄러운 존재가 환율이다.

요즘 한국 환율 점수가 크게 출렁거린다. 지난해 11월 말 달러당 1394원이던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500원을 위협하고 있다. 국민연금 환 헤지(환율변동 위험 회피) 물량 공급으로 잠시 안정세였지만 상승 흐름을 막기엔 태부족이다. 환율 상승에는 국내외 요인이 복합작용 중이다. 우선 국내 정치 불안이 수습돼도 정치 파행이 초래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환율 점수가 깎인다(환율 상승)는 의미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관세 부과 정책도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미국 인플레이션이 재점화될 거란 예측 때문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올릴 일만 남았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이미 미 국채 30년 만기 금리가 연 5%에 육박했다. 2023년 11월 이후 최고치다.

한국은 서방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대받는 나라다. 올해 수출은 7000억달러를 넘어설 걸로 보인다. 전 세계 5위다. 대외금융자산은 2조5135억달러(외화보유액 4154억달러 포함), 경상수지 흑자가 900억달러, 국내 거주자 외화예금이 989억달러다. 세계국채지수(WGBI) 신규 편입으로 560억달러 유입이 기대된다. 그런데도 원화 환율은 변동성 리스크에 늘 노출된 신세다.

그렇다고 환율시장에 정부가 개입하면 부작용이 더 크다. 환율 등락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시장의 자율 조정 과정이다. 당국이 개입해 환율 급등을 잠시 누를 수 있지만 수면 아래에선 폭발력이 증폭된다. 외환위기 가능성을 키우는 거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가 그 증거다. 지난해 12월 외화보유액은 줄지 않고 2억달러 정도 늘었다. 당국이 외환시장 개입에 자제력을 발휘했음을 보여준다. 긍정 포인트다.

환율 변동을 마구잡이로 막기보단 시장친화적 대응이 갈 길이다. 미리미리 대외신인도를 점검하고 외화 안전판을 촘촘히 짜두는 것이다. 정부가 내놓은 방안은 달러 수급 안정화 체계 구축, 국내 금융시장 안정, 국제사회 소통 강화 등이다.

옵션이 더 없을까. 우선 2022년 5월 한·미 정상 간 공동선언문을 들 수 있다. ‘외환시장 충격이 올 때 양국이 서로 협력한다’는 약속을 문구로 남겼다. 한·미 통화스와프에 준하는 환율 안전판으로 기대를 모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조 바이든 대통령의 모든 약속을 백지화할 걸로 예단할 건 아니다. 한국 외환시장 안정은 한국에 투자한 미 금융회사·기업의 손익을 좌우한다. 미국 국익에 부합한다. 공동선언문 취지가 이어지도록 양국 정부가 협력할 필요가 크다.

미 재무부 환율안정기금(ESF)도 고려해볼 옵션이다. 미 의회 승인 없이 재무부 재량으로 쓸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때 미 재무부가 한국 지원을 제안한 바 있다. 한·미 통화스와프 라인 개설이 여의찮은 상황에서 논의해봄 직하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미군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요구 등과 연계하면 어떤가. 새로운 한·미동맹 루트로 양국 정부가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정치인들은 자기 생각과 행동이 현미경 아래 놓여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미국 최초 한국계 상원의원 앤디 김은 지적했다. 국제사회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정치권이 언어와 행동에 품격을 지키고 국민도 진행 중인 민주적 헌법 절차를 차분히 지켜보는 것. 환율 성적을 올리는 지름길이다. 비상계엄으로 나라 체면이 손상됐지만, 한국 외환시장 회복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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