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이날 고급 컴퓨팅 칩과 특정 폐쇄형 AI모델에 대한 웨이트 규제와 검증 소비자(VEU) 승인에 관한 최신 규정을 내놨다. 새 규정은 전 세계 국가를 3개 등급으로 나눠 반도체 공급을 제한한다.
가장 상위 등급에는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18개국이 포함됐다. 이들은 미국산 반도체를 지금처럼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다. 나머지 국가는 일본 대만 네덜란드 덴마크 벨기에 핀란드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페인 스웨덴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다.
적대국은 미국산 반도체를 실질적으로 수입할 수 없다. 중국 홍콩 러시아 북한 이란 베네수엘라 쿠바 벨라루스 이라크 시리아 등 20여 개국이 해당한다.
나머지인 세계 대부분 국가는 AI 반도체를 수입할 수 있는 총 연산력(computing power)에 상한이 설정된다. 2등급 국가 또는 2등급 국가에 본사를 둔 기업은 2025년부터 2027년까지 3년간 공급받을 수 있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최대치가 약 5만 개로 제한된다. 그 대신 미국 정부가 제시한 보안 요건과 인권 기준을 따르기로 동의하면 국가별 상한보다 많은 반도체를 수입할 수 있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전 세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고, AI와 관련된 국가 안보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통제가 혁신이나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저해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라고 밝혔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은 미국의 AI 리더십을 보존하고 확장하며, 미국의 AI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국가 안보 책임을 가지고 있다"면서 "최첨단 AI 훈련 인프라가 미국과 밀접한 동맹국에 머무르면서도, 전 세계적으로 미국 AI의 확산을 촉진할 수 있는 규정"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정부는 이번 수출 통제에도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규정을 활용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는 데이터센터 VEU 규정을 두 가지로 나눴다. 미국이나 특정 동맹 및 파트너 국가의 단체중에서 '보편적 VEU'로 인정을 받을 경우 전 세계(무기금수국 제외)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수 있는 승인을 받을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사전에 승인된 기업에만 지정된 품목의 수출을 허용하는 일종의 포괄적 허가다. 미국 정부가 2023년 미국산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면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현지 공장에는 예외를 허용할 때 해당 규정을 활용했다.
또 무기 금수국 외부에 본사를 둔 단체가 지정된 위치에 추가승인 없이 데이터센터를 세울 수 있는 승인을 내 주는 '국가 VEU' 개념도 제시됐다. 예컨대 1등급 국가에 본사를 둔 기업이 VEU 규정을 활용하더라도 총 연산력의 25%까지만 2~3등급 국가에 배치할 수 있다. 2~3등급 국가 한 곳당 배치할 수 있는 연산력도 7%로 제한된다. 또 미국 본사를 둔 기업이 VEU를 신청하려면 총 연산력의 최소 절반을 미국 내에 유지해야 한다. 이를 통해 미국과 동맹국이 항상 다른 국가보다 더 높은 연산력을 보유하도록 보장한다는 구상이다.
새 규정은 또 가장 우수한 기술의 폐쇄형 가중치 AI 모델의 모델 가중치에 새로운 통제를 도입하되, 미국 및 동맹국 등에 본사를 둔 단체가 예외 인공지능 승인(AIA)을 받을 경우 이를 수출하거나 국내 이전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널리 사용가능한 모델(개방형 가중치 모델)을 가진 모델은 통제 대상에서 제외됐다.
상무부는 전날 기자들을 상대로 한 질의응답에서 공급망을 위한 활동, 예컨대 반도체를 포장하거나 테스트하는 활동은 이런 통제에서 제외된다고 밝혔다. 아울러 게임용 반도체의 경우 AI 반도체의 능력에 육박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런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국가 안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상무부는 설명했다.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한 대규모 주문이 아니라 연구 목적 등의 소량 주문도 통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상무부는 "시장에서 가장 앞선 수준의 가속기라 하더라도 해마다 1700개까지는 저용량 예외를 받을 수 있다"면서 "이는 약 5000만~6000만달러어치"라고 설명했다. 이는 "거의 모든 대학의 요구량이나 연구에서 필요한 양을 감당하는 것"이며 "상당히 많은 정규 상거래가 매우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꽤 높은 최소 기준"이라고 덧붙였다. BIS 관계자는 "꽤 높은 최소기준까지 상당히 공격적으로 간소화했다"고 자평했다.
이를 넘어서는 용량의 반도체를 수입하려는 국가는 이를 허용하는 라이센스 절차를 따라야 할 것이며, 그보다 더 많은 양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VEU 프로그램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상무부는 안내했다. "(18개 동맹국에 포함되지 않은) 브라질, 폴란드, 인도 등의 기업도 VEU를 신청할 수 있으며 이들은 사이버 보안태세, 수출통제 관리 상태, 물리적 보안 태세 등에 대한 점검을 거쳐 VEU 승인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발표에 앞서 상무부는 120일 간의 의견 수렴절차를 거쳤다. 설리번 보좌관은 "이 규칙은 우리의 전략적 경쟁자들이 밀수와 원격 접속을 통해 우리의 수출 통제를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면서 "전 세계의 친구들과 파트너들이 강력한 보안 요구 사항이 필요한 미국 공급업체와 현지 공급업체 모두 고급 AI를 위해 신뢰할 수 있는 공급업체를 사용하도록 장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에 대해서 엔비디아 등은 반대 의사를 밝혔다. 엔비디아는 앞서 이 내용을 일부 입수해 보도한 블룸버그 통신에 보낸 성명에서 “세계 대부분에 대한 수출을 제한하는 규정은 (AI 반도체) 남용 위험을 줄이기는커녕 경제 성장과 미국의 리더십을 위협하는 중대한 정책 전환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김리안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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