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변하지 않아야 믿음이 싹튼다

입력 2025-01-15 17:33   수정 2025-01-15 17:34


생전의 아버지는 ‘사람’보다 ‘인간(人間)’이란 말을 즐겨 썼다. 단순히 사람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인간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철학적 관점을 언제나 그렇게 강조했다. 입버릇처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그래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까지 했다. 아버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건 믿음이다”라며 ‘관계’를 곧잘 얼음에 비유했다. “살얼음도 있지만, 단단해 사람이 건널 수 있는 얼음도 있다. 그러나 언제라도 얼음 같은 믿음은 깨질 수가 있다”라며 사람과의 관계는 항상 새로 시작하는 것 이상으로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1964년.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혁명정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일하느라 집을 비웠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이튿날부터 마을 일을 보기 시작했다. 시멘트 공장이 마을에 들어올 때다. 공장 지을 용지 매입 실무를 맡은 아버지는 밤을 새워 일했다. 부지 매입이 마무리된 이튿날에는 공사 인부 기숙사와 식당을 짓기 위해 처음 보는 불도저 두 대가 마을에 들어왔다. 동생과 같이 쓰는 우리 방이 기사들이 먹고 자는 방으로 변했다. 불도저는 공장 용지가 될 논을 훤히 내려다보이는 낮은 산을 곧추서다시피 기어 올라갔다. 반나절이 지나자 전에 살던 집 안방 문을 열면 보이던 해 뜨는 산이 날아갔다. 이튿날 기사들이 동생과 함께 불도저에 태워줬다.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산이 순식간에 뭉개져 내렸다.

그날 저녁 아버지께 흥분한 내가 “해가 뜨는 산이 무너졌다”라고 하자 말씀이 길었다. 아버지는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이 ‘믿음’이다. 신뢰를 말한다. 그 믿음은 ‘믿다’에서 온 말이다. 어떤 대상을 ‘밑’(바탕이나 근거)으로 여긴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사람들은 처음 만날 때 자신의 강한 부분을 상대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사귀기 어렵다. 자신의 약점이나 밑을 보여주면 쉽게 교제할 수 있다”라며 “어려운 사람하고는 대소변을 같이 보면 금세 친해진다”라고 웃으며 예를 들어 설명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어렵게 얻은 믿음도 얼음과 같아서 언제든 쉽게 깨질 수 있다. 네가 얘기했듯이 해가 떠오르는 동산이 무너져 변하더라도 내일 아침 해는 그 자리로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변하지 않아야 믿음이 싹튼다”라며 인간관계의 믿음이 깨지지 않으려면 “변치 말아야 한다”고 일러줬다. 자라면서 아버지는 몇 번이고 “정직, 신뢰, 사랑, 도덕성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덕목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상황이 어려워지거나 환경이 변할 때, 자신의 본래 모습이나 신념을 잃어버리기 쉽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잃지 말라. 항상 일관된 마음과 태도를 유지하라”는 교훈을 저렇게 강조했다.

아버지는 “해와 달이 뜨는 것 말고는 모두 변했다. 네가 보았듯 산도 무너지고 물줄기도 바뀐다”고 전제한 뒤 “문명은 인류의 삶을 더 세련되게 하는 거다. 문명화를 거치며 ‘모든 것은 변한다’”고 했다. 이어 “인류는 모든 것을 변화시켜 새로운 문명의 이기(利器)를 만들지만, 그 이기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변하지 않을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내 변질되고 만다”며 “사람과의 관계는 처음 만났을 때의 네 자세와 태도에 변함이 없어야 믿음이 자리해 관계가 유지된다”고 늘 가르쳤다.

아버지가 ‘근본을 잊지 않는 마음을 일컫는 말’이라고 일러준 고사성어가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다.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하고 죽는다’라는 말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한다. 《예기(禮記)》 단궁상편(檀弓上篇)에 나온다. 중국 은나라 말기 본래 이름이 여상(呂尙)이었던 강태공(姜太公)이 위수에 사냥 나왔던 창(昌)을 만나 함께 주왕을 몰아내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그 공로로 그는 제(齊)나라의 영구(營丘)라는 곳에 봉해졌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를 포함해 5대손에 이르기까지 다 주나라 천자의 땅에 장사지내졌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한 말에서 유래했다. “음악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즐기며 예란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향하는 것은 인이라고 하였다[古之人有言 曰狐死正丘首仁也].” 그 후 반장(返葬:객사한 사람을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내는 일)이 유행했다. 이 행동을 인(仁)이라 사람들은 얘기한다.

아버지는 초심과 본질을 잃지 않는 태도를 중심으로 인성을 갖추기를 항상 요구했다. 그 인성이 삶의 원칙과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지적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호를 ‘동산(東山)’으로 자호(自號) 했다. 때로 내게 “오늘 해도 동쪽 언덕에서 떴겠지”라며 변치 않는 일관성을 일깨우고 독려했다. 손주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품성이다. 단순한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어른의 모습이 최고의 가르침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