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30분 남짓 달리자 큼지막한 ‘SAMSUNG’ 로고가 한눈에 들어왔다. 삼성전자가 미국 인공지능(AI) 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테일러시에 짓고 있는 공장이다.
2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 등 최첨단 반도체 생산 라인이 들어설 공장 2개 동과 연구개발(R&D) 시설은 외관 공사를 마쳤다. 삼성전자를 따라 온 협력사들은 공장 주변에 설치한 수십 개 컨테이너에서 납품을 준비 중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협력사 관계자는 “건물 내부 공사가 마무리됐다”며 “생산 계획 등이 확정되는 대로 설비 반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은 대규모 투자로 화답했다. 올해 글로벌 기업이 발표한 미국 AI 투자액만 1110억달러(약 163조7000억원)에 달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메타, 아마존 등 4대 빅테크의 작년 한 해 AI 투자액(2090억달러)의 절반 이상이 올 들어 보름 만에 나온 것이다.
미국에 부는 AI 열풍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용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한 한국 기업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HBM 최강자’(작년 점유율 52.5%) SK하이닉스가 가장 적극적이다. SK하이닉스는 38억7000만달러(약 5조6000억원)를 투입해 연내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HBM 공장을 착공한다. 생산 시점은 2028년 하반기다.
이곳에서 제조한 최첨단 HBM은 대만 TSMC의 애리조나 패키징 공장으로 옮겨져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에 결합된다. 이렇게 만든 AI 가속기는 빅테크가 구축하는 AI용 데이터센터에 들어간다. 업계에선 HBM이 전기자동차와 로봇 등에도 장착될 것으로 예상한다. HBM 수요가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것이란 얘기다.
한국 기업은 저전력 반도체용 특화 소재 사업에서 기회를 찾고 있다. 유리기판(글라스 코어)이 대표 사례다. 기판 재료를 플라스틱에서 유리로 바꾼 이 제품은 기존 플라스틱보다 40% 빠른 데다 전력 소모량도 절반에 불과하다. 생산기간도 대폭 줄어든다. AMD, 브로드컴 등 반도체 설계 기업이 유리기판 도입 계획을 밝힌 만큼 조만간 큰 시장이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유리기판 분야에서 가장 앞선 국내 기업은 SKC다. 이 회사는 미국 자회사 앱솔릭스를 통해 2022년 미국 조지아주 커빙턴에 3000억원을 들여 유리기판 공장을 세웠다. 연내 상용화에 성공하면 ‘세계 최초’ 타이틀을 얻는다.
SK실트론은 차세대 전력 반도체 원판인 실리콘카바이드(SiC) 웨이퍼에 승부를 걸었다. 미국 자회사 SK실트론CSS를 통해 미시간주 공장 증설에 나섰다. 2027년까지 6억3000만달러를 들여 충분한 생산능력을 확보할 계획이다. SiC 웨이퍼로 만든 전력 반도체는 기존 실리콘 웨이퍼 제품보다 고온·고전압을 견딜 뿐 아니라 전력 효율성도 높다. SK실트론은 연내 미시간 베이시티 공장에서 200㎜(8인치) SiC 웨이퍼를 생산할 계획이다. 150㎜(6인치)가 주류인 이 시장에서 아직 8인치 제품을 내놓은 기업은 없다. SK실트론 관계자는 “6인치 제품에 이어 8인치 제품도 양산하면 관련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시장 상황에 따라 추가 증설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빅테크가 TSMC에 집중된 공급망 다각화에 나선 데다 트럼프 당선인이 TSMC와 중국의 커넥션에 의구심을 가진 만큼 삼성전자에 기회가 올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이 수율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고객과의 네트워킹을 강화하면 언제든 빅테크를 고객 리스트에 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테일러=김채연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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